다산 정약용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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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서학 등 새로운 사조(思潮)에 눈떴던 집안

-재능이 있었으나 닫힌 시대와 당쟁에 희생된 형제들

-다산의 성장기/청년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하다

-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서학(서양문물, 서양학. 천주교를 말함)을 처음 접하다

-정조의 기대 아래 벼슬길 시작되다

-화성에 발현된 기술관료 다산의 역량

-암행어사 정약용

-천주교를 빌미로 한 노론의 대공세

-곡산부사, 지방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다

-정조임금의 죽음, 하늘이 무너지다

-죽음의 문턱에서 귀양지로

-개인적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에

-다산초당에서 이룬 학문적 업적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일 뿐

-유유자적의 시절, 학문과 인생을 정리

-나의 학문과 사상 훗날 알아주리라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학문

-경세학(經世學),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민(民)이 근본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하고 넉넉하게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선비도 지혜로워야 한다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속된 선비와 참된 선비

온 백성의 양반화와 모든 대학의 일류화

실력도 기여도 없이 대접만 받는 족속들

정원제한이 아니라 정원 철폐도 한 방법


본문내용
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李檗)은 퇴계 이황의 학설을 주장했고 다산이 답변한 내용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됐다. 정조가 다 보고 난 후 다산을 매우 칭찬하고 1등으로 삼아주었다. 다산은 이후 성균관 우등생으로 학자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서학(서양문물, 서양학. 천주교를 말함)을 처음 접하다

23세(甲辰年, 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았다. 그러나 다산은 성균관(태학) 공부에 힘쓰느라 그 외의 일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26세(丁未年, 1787) 이후로는 임금의 총애가 더욱 높아갔고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정자(亭子)에 나가 과거 공부에 열중했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듬해(戊申年: 정조 12년, 1788) 서교를 탄압하자는 상소가 빗발쳤고 서교에 관한 책을 압수해 불사르기도 했으며, 남인 내에서 공서파(攻西派)가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홍낙안 · 목만중 · 이기경 등이 정약용 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조의 기대 아래 벼슬길 시작되다

28세 때(己酉年, 1789) 봄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의 벼슬생활은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1800)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 후반기 12년 동안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신들의 품의로 규장각(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됐다. 규장각은 정조가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골라 더욱 학문에 정진하게 하고 장차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측근으로 활동하게 됐다.

화성에 발현된 기술관료 다산의 역량

31세 때(임자년, 1792) 봄에 홍문관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4월에는 아버지가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 것이다.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