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의 유럽과 유럽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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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70-80년대의 유럽과 유럽공동체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1970년대, 80년대의 유럽

(1) 1차 오일쇼크 (1973. 10.16)

(2) 2차 오일쇼크

(3) 과거 냉전체제로의 복귀

2. 1970년,80년대의 독일

(1) 서독
① 사회
② 정치
③ 경제
(2) 동독
① 사회
② 경제

3. 유럽공동체 European Community (EC)

(1) 유럽공동체 (EC)
(2) 유럽공동체 기관
(3) 유럽공동체의 발전과정
(4) 유럽공동체의 유럽통화제도
(5)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로의 발전

※참고 자료
본문내용
2. 1970년,80년대의 독일
(1) 서독
① 사회
- 브란트 정권은 동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나 국내 개혁 부문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사회 민주당과 자유 민주당의 입장 차이가 문제였다. 사회 민주당이 추진하던 복지 정책은 1973년 1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브란트의 후임으로 재무 장관이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취임하여 실용적이고 이념을 초월한 정치를 실천하였다. 그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보다는 브란트 정부가 세워온 기존의 정책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슈미트 정권은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실천하고 상징하면서 1974년 5월 ~ 1982년 10월까지 8년 반을 집권하여, 연방공화국 사상 최장수 연정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출범 즈음에 슈미트 수상은 크게 3가지의 사회 정책을 내놓는다.
첫째는, 1973-4년 유가가 4배나 뛰는 바람에 요동을 치고 있던 사회구조에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는, 1970년대 말 미국과 소련의 정책이 데탕트의 전제 자체를 뒤흔드는 분위기 속에서 서독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 가운데 동방정책을 지속하면서 동서 데탕트에 참여해야 하는 과업이었다. 세 번째는 국내 치안 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1974-7년 사이에 벌어진 폭력 테러 진압과 환경주의자/평화주의자들이 벌인 소위 ‘새로운 사회 운
동’의 대두를 다스리는 과업이었다. 전국을 휩쓴 테러로 인한 내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뚜렷한 변화를 보인 사회 현상으로는 도시화와 이로 인한 전통적인 가족 관계의 해체를 들 수 있다. 농업 인구의 감소와 노동 및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증가는 이러한 도시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 인구의 증가는 사회 정책의 비중을 더욱 높여 주었다. 주 40시간으로 줄어든 노동 시간은 여가 시간에 대한 서독인들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서독인들의 생활 수준은 이미 서방 국가들 중에서도 선두 그룹에 속해 있었다.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는 독일 문화의 미국화라는 비판을 야기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슈미트 정권은 경제위기를 벗어나고자 1976년 노사 공동결정법을 마련한다. 이는 각 사업장마다 사용자와 노조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는 감독기구를 수립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여성의 낙태와 이혼권에 대한 법률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76년에 부부가 가사를 완전히 자유롭게 분담하도록 하는 가정의 권리와 결혼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수십 년에 걸친 사회 발전이 드디어 법제화되었다. 그 이전의 도이치 민법은 가사가 전적으로 주부의 책임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즉, 서독의 여성 지위는 영미 계통에 비해 보다 엄한 법적 제재가 가해지고 있었기에 여성의 낙태와 이혼권에 대한 논의가 발생하였다는 상징성이 굉장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서독 사회에서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전후 경제 복구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과거 나치 시대에 대한 철저한 청산에 실패했던 서독 사회는 ‘68세대’를 중심으로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 되었다. 나치 부역자들의 취업을 금지하는 직업금지법이 제정되고, 사

회적으로 나치 시대의 과거 청산 분위기가 자리를 잡아 가게 된 것이다.

새로이 등장한 반핵운동과 환경에 대한 관심은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맞물려 새로운 정치 운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면서 형성된 반전주의자들의 평화운동은 반핵운동과 맥을 같이하면서 서독 사회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환경오염의 후유증으로 미숙아와 기형아 출생이 증가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자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이것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1979년에는 이와 같은 다양한 주장을 하는 집단들이 정치적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평화주의자 켈리와 화가이 보이즈가 주축이 된 ‘녹색당’이 탄생하기도 한다.

② 정치
- 헬무트 슈미트 [Helmut Schmidt, 1918.12.23~]
참고문헌
안드레아스 힐그루버 저, 손상하 역. {독일 현대사}. 까치글방, 1991.
이종서. {유럽연합(EU).국가.신자유주의}. 한국학술정보(주), 2006.
이희범. {유럽통합론}. 법문사, 1997.
권형진. {독일사}. 대한교과서,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