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5,18광주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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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현대사]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5,18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5·18의 배경
1.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2. 10·26사태이후 정국
⑴ 정치군인 전두환의 기반, 하나회
⑵ 권력의 틈을 노리는 신군부와 서울의 봄
⑶ 어째서 광주인가?

Ⅱ.전개과정
1. 5.18 직전의 상황
2. 광주 민주화 운동

Ⅲ. 5.18 그 후
1. 518 이후의 정계변화

(1) 국보위와 국보위 상임위원회 설치

(2) 국보위의 활동

(3)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

(4) 국가보위 입법회의의 활동

2. 518 이후 미국과의 관계
(1) 미국의 전두환 정권 지지

(2) 민중들의 반미 시위
3. 통계
(1)5.18 피해보상
(2)5.18 피해자들

Ⅳ.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는 관점 또는 인식
1. 언론보도
(1) 5․18 당시 중앙언론의 보도

(2) 외신보도 실태
(3) 5․18이후 언론의 보도

1) 군부집권세력 관점 (‘광주폭동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환)
2) 자유주의적 관점 (‘광주의거’ 또는 ‘광주시민항쟁’으로 보는 시각)

3) 진보주의적 관점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중무장봉기’론)

4) 국민들의 관점

5․18과 민주화

1) 5․18관련자 재판
2) 5․18진상규명 투쟁과 광주 청문회

5.18의 의의
①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

② 일반 민주주의의 진전

③ 일반 시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

④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

본문내용

⑵ 권력의 틈을 노리는 신군부와 서울의 봄 서울의 봄: 10∙26부터 신군부의 정권탈취전까지 각계각층에서 민주화열기가 고조된 시기. 노동계만 보더라도 80년 4월까지 발생한 집단노사분규는 720건이었는데 이는 79년 같은 시기에 비해 무려 7배에 해당한다. 학원중심의 민주화운동은 80년 3월 신학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도호국단해체’, ‘학내언론자유’ 등 학내문제에 관련된 광범위한 이슈를 중심으로 발화되었다. 4월 16일 서울대 비상학생총회에서 학내문제에 그치기보다 정치민주화와 사회개혁을 기치로 운동을 전개해나가자고 결의하였으며, 5월들어 유혈과격화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앞서 밝힌 듯이, 신군부는 그동안의 오랜 군사권위주의 통치체제하에서 이미 성장해왔으며, 이를 저지할 국내외 세력이 없는 한 박정희이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 세력으로서 민간 관료, 군부 내 비정치적 세력, 그리고 시민사회내의 민주화운동세력들에 비해 군부정치세력은 강력한 권력의지로 조직적 역량을 박정희체제하에서부터 이미 키워올 수 있었다. 이런 정치적 조건하에서 신군부의 집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정치군인인 이들은 80년 12월 12일 쿠테타로 군권을 장악 12·12쿠테타: 전두환·노태우등 신군부는 대규모병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하여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장군을 연행해가면서 하룻밤 사이에 계엄하의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승화가 10·26만찬장에 있었고 사건 직후 김재규와 육군본부까지 같은 차를 타고 왔다는 게 연행의 명분이었다. 최규하와 정치계는 이를 사실상 방관하였으며 주한미군 위컴사령관도 묵인하였다.
하고는 명분을 취할 시기를 엿보고 있었고, 광주는 그 권력쟁취 명분의 상징적 희생양이었다. 서울의 봄 시기에 있었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의 저항은 오히려 신군부측의 질서유지와 국가안보수호의 이름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14일 시청 앞 시위에 이어 15일 서울역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기다린듯이 취해진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이미 학생들의 소요 가능성을 점친 신군부가 5월 3일부터 충정작전 충정작전: 1980년 2월 18일 신군부는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전군과 경찰에 지시했다. 공수특전부대에만 실시되는 특수훈련임에도 수도경비사령부의 주관하에 1,2,3군 및 경찰까지 충정작전에 돌입,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었다. 충정작전은 소요와 폭동에 따라 진압의 성격이 차이게 났지만,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공세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시위가 폭동에 해당할 경우에 적용되는 작전개념이었다. 2월 18일부터 돌입한 충정훈련의 작전개념은 소요사태가 아닌 폭동진압의 훈련이었다. 이들은 기본장비외에도 화학탄, 화염방사기, TNT등 공격적인 장비들을 사용하는 등 잔인한 5월의 살상을 예고케 하였다.
을 위한 부대이동을 시작해 이날 계염확대와 동시에 부대투입을 개시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⑶ 어째서 광주인가?
광주민중항쟁은 5·17조처에도 아랑곳없이 민주화를 위한 외침을 수그러뜨리지 않았던 광주지역의 대학생들과 시위 초기부터 나타난 진압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사태가 험악하게 진행되어 되레 시민들의 참여를 촉발케 한 측면이 크다.
①광주는 박정희시절부터 산업개발에서 소외되어 온 도시였다. 광주 및 전라도지역의 상대적 소외를 심화시킨 박정희정권의 부문간·지역 간 불균등 개발은 70년대 전반에 걸쳐 만연된 불경기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농촌의 황폐화와 이농민의 급증, 미약한 산업기반, 도시빈민의 양산, 도시자영업자의 점증하는 곤란 등을 야기했다. 또한 1970년대 말에 진행된 세계적 공황의 여파는 전남지역의 경제를 심각한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켰고, 이것들은 광주민중항쟁의 전 기간을 통해 표출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②당시 광주는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상대적으로 계급분화가 지체되고 있었다. 또한 광주와 호남은 전국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가계급이 비중이 현저히 낮고, 농민층과 비농업 자영업자층의 해체가 지체되어 이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이는 이후 항쟁과정에서 공동체의식과 연대의 밑거름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③광주·전남지역은 이미 유신체제하에서도 끈질긴 저항의식을 표출해 온 사람들이었다. 호남평야를 가진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부터 약탈의 대상이었다. 배제의 역사에 살아온 이들에게 억압된 욕구는 매우 컸다.
특히 이 지역은 타지역에 비해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곳으로, 지식인들(교수·문인)들이 시국정세에 비판을 가하고, 이를 따르던 학생들도 많았다.
15일 서울역 회군 서울역 회군: 각주4)에서 보듯이 학원민주화열기는 5월 15일 밤부터 16일 아침까지 계속된 서울지역 23개 대학과 지방의 23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된 회의에서의 가두시위중단결의에 따라 일단 진정되었다. 서울지역에서는 서울역에 10만이 넘는 학생들이 집결해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시위했으나 학생지도부들의 투쟁방침 토론을 통해 회군이 결정(단계적 투쟁론)되었고 내무부 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안전귀가를 보장받는 대신 학교로 퇴각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래 서울지역 대학가가 잠잠한 가운데 16일 발생한 지방 23개의 대학의 시위참여자가 3만명인데, 그 중 2만명이 광주지역의 참가자였다는 사실은 광주를 타깃으로 하게 된 이유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