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정책] 북한-중국 정치 관계의 변화와 현안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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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외교정책] 북한-중국 정치 관계의 변화와 현안 과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북한과 중국의 정치 관계 변화
1)1992년 이전의 북한과 중국의 정치관계

2)1992년 이후의 북한과 중국의 정치관계

Ⅲ.북한과 중국의 정치적 현안과제
1)북한 핵문제와 6자회담

2)탈북자 문제

3)군사협력 문제

Ⅳ.결론(향후전망)

본문내용
2)1992년 이후의 북한과 중국의 정치 관계
1992년 직전까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던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1992년 8월 한ㆍ중 수교 이후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2년 8월 한ㆍ중 수교 이후부터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크게 세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 1992년 이전에 비교적 원만하던 북·중 관계는 1992년 8월에 한ㆍ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냉각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ㆍ소 수교에 이어 이루어진 한ㆍ중 수교는 교차승인14) 교차승인: 남북한의 어느 한쪽만 승인하던 나라들이 다른 한쪽도 정식으로 승인하는 일.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을 각각 승인하여 국제 정세의 긴장완화를 꾀하는 것이다.
반대라는 자신의 일관된 주장이 좌절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ㆍ중 수교는 북한외교의 고립을 결정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북한외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한ㆍ중 수교 전만해도 자오쯔양(趙紫陽) 중공당 총서기(89.4), 장쩌민(江澤民) 중공당 총서기(90.3), 리펑(李鵬) 국무원 총리(91.5),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위급 인사들이 빈번히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역시 1989년 11월과 1991년 10월에 중국을 방문하는 등 양국관계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ㆍ중 수교 후 양국 정상들의 상호방문은 뚝 끊겼다. 이는 한ㆍ중 수교 이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과 중국 정상들 간의 상호방문 및 교류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15) 1987-1999년 사이의 양국 수뇌부의 회담 현황 참조
한ㆍ중 수교에 대해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양해를 구했다고는 하지만 북한은 이를 배신행위로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대해서 과거 냉전시대처럼 대응할 수 없었다. 1992년의 상황은 중국이 유일하게 사회주의 깃발을 내건 강대국이었다. 북한은 한ㆍ중 수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의 외교적 지원이 필요했다. 특히 식량과 에너지난이 가중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원조가 긴급히 필요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서 북한은 중국에 대해 감정적으로 느끼는 배신감을 현실에서 관계약화로 연결시키는 것을 자제했으며, 중국 역시 남한과의 급격한 관계개선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동북아 역학구도와 역사적 관행을 고려해 양국의 전통적인 정치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둘째,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핵문제 타결이 이루어지면서 양국관계가 적대에서 협상단계로 이행하자, 중국은 여기에 대응해 북한과의 관계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한ㆍ중 수교 후 양국관계는 일시적으로 냉각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곧 회복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중ㆍ북관계가 비록 동맹관계로의 복원은 아니지만 정상화 단계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부터였다. 북한은 이때부터 그동안 단절되었던 대 중국 정상외교를 복원시키며 적극적으로 관계개선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1999년 6월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홍성남 내각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 이후 총리급 이상으로는 8년 만의 방중이었다. 따라서 김영남의 중국 방문은 1992년 4월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끝으로 끊어졌던 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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