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란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임술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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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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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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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Ⅱ. 본론
1. 민란의 원인
2. 홍경래의 난
1) 발생배경
2) 준비과정
3) 봉기
4) 정부군의 정비, 송림전투
5) 정주성 농성
6) 항쟁의 결과
7) 항쟁의 역사적 의의
3. 임술민란
1) 임술민란의 원인
2) 임술민란의 전개
3) 임술민란의 결과
4) 임술민란의 한계와 의의
5) 진주민란과 그 밖의 사건들
(1) 진주민란
①진주민란의 배경
②진주민란의 전개
③진주민란의 확대와 해산
(2) 개령민란
(3) 제주민란
(4) 금구민란
(5) 은진민란
(6) 익산민란

Ⅲ. 요약 및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3) 봉기

순조 11년 12월에 이르러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의 일선 졸병들은 이들 광산 노동자층으로 구성되었고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여러 다양한 업종과 향임들도 참가하였다. 가산 박천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이나 품삯 노동자들도 모여 들었다. 신분은 다양했지만 대개가 가산, 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노동층 같은 빈민들이었으며 이 때 모여든 일반 군사력은 봉기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자발적으로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봉기 날짜는 12월 20일로 잡고 출병에 앞서 12월 15일 평양에 사람을 보내 대동관을 폭파하고 그 곳에서 소요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폭파장치가 물에 젖어 발화시간이 늦어지고 담당자도 도망하여 계획은 단순 화재에 그치고 말았다. 17일에는 여러 지역의 반군들이 다복동으로 모여들어 소란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소란한 사태는 곧 수령에게 포착되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18일 아침 민간인 수십 가구가 일시에 도주하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이들을 잡아들여 문초하였고, 그 결과 곽산의 김창시 등이 결당하여 난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홍경래 등은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에 봉기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가산, 박천, 안주의 방향과 정주, 곽산, 선천, 철산을 거쳐 의주로 가는 북쪽 방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 공략하기로 하였다. 남진군의 지휘는 홍경래와 그 밑의 선봉장 홍총각, 모사 우군칙, 후군장 윤후검이 주도하였고 북진군의 지휘부는 부원수 김사용, 선봉장 이제초, 모사 김창시 등으로 구성 되었다. 그리고 이희저는 남북진군의 군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12월 19일 새벽 3시경에 가산 삼교에 이르렀고 곧 가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관아의 무기를 확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민심
아래의 사진은 홍경래가 장기항전을 했던 정주성 성곽의 모습이다.



정주성 성곽
출처 : 다음 블로그



을 얻고 군사를 더 모으기 위해서 였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은 각 지역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하고 봉기군에 가담하라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20일 새벽 박천읍에 도달하였고 역시 조그만 저항도 없이 함락 되었다. 박천을 점령한 봉기군은 영변을 공격하고 이어 안주를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천을 점령한 후 직접 안주를 공격하자는 논의가 제기 되었다. 도원수 홍경래가 이를 승낙하려 했으나 모사 우군칙이 원래의 계획대로 영변을 친 후에 안주를 칠 것을 고집하였다. 안주, 영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김대린 등은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홍경래를 죽여 정부쪽에 공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김대린이 갑자기 칼을 뽑아 휘둘렀고 홍경래는 민첩하게 피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주 병영에서 가담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
참고문헌

참고문헌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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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2004)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P467-470, 웅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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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1993) 한국의 역사 2, P210-219,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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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1990) 한국사특강, P120-125, 서울대학교 출판부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2008) 한국사특강, P120-,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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