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상] 오규소라이의 유교적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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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사상] 오규소라이의 유교적 입장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고문사(古文辭) 연구
-하늘(天)의 불가지성(不可知性)
- 성인(聖人)이 도(道)를 만드셨다는 주장
- 작위적(作爲的) 세계로서의 도(道)
- 문화로서의 도(道)
본문내용
-고문사(古文辭) 연구

먼저 소라이 유학 사상의 기반이 되는 그의 학문적 방법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반은 보통 고문사학(古文辭學)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문장 양식과 구문법에 대한 연구라 하겠다. 물론 '고문사'라는 말 자체는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비롯한 일단의 명대(明代) 학자들이 새로운 문학 운동을 전개하면서, 문장의 이상적인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 제창한 것이다. 본래 고문사는 육조(六朝) 시대에 유행했던 사륙(四六)체의 문장 형식에 반대하여 당(唐)의 한퇴지(韓退之)가 제창한 문장 형식으로, 앞서 언급한 명대 학자들의 시대에 각광을 받았으며, 문장의 명료함을 각별히 강조한다. 고문사의 첫 제창자인 한퇴지의 시대 이후로 계속 널리 통용되던 문장 양식을 앞서의 명대 학자들은 금문(今文)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이제 금문을 지양하고 진한(秦漢) 시대 및 그 이전의 문장, 즉 고문사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최대한의 수사적(修辭的) 능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명료하게 기술하는 것을 각별히 강조했다.
대략 40세를 전후로 하여 소라이가 이반룡과 왕세정의 시 및 산문을 접하고 고문 양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만남 이전에도, 소라이에게 중대한 지적 자극제의 역할을 한 체험이 있었다.
먼저, 14세때 그의 아버지가 에도에서 추방당함으로써 소라이가 농촌 지역에서 12년 동안 청년 시절을 보낸 다음 에도로 돌아와 깨우치게 된 새로운 방법론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떠나 있던 12년 동안 에도에서의 삶의 방식과 현실이 자신이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면적으로 달라졌음을 느꼈다. (당시의 에도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에도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거대한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런 변화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기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소라이는 자신이 에도라는 닫힌 세계 바깥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에도에서 새롭게 진행되는 모든 변화의 총체상을 신선한 눈으로 객관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소라이는 그러한 각각의 '세계'를 울타리 또는 틀, 즉 '쿠루와'(廓)라는 말로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또한 다음과 같은 점에 각별히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에도에 정착한 이후 자신의 중국어(당음; 唐音) 연구가 심화 될수록, 소라이는 이러한 일종의 방법론적 발견이 지니는 철학적 함축을 보다 더 충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들을 위해 집필한 초기의 몇몇 논저, 특히 {훈역시몽}(訓譯示蒙)에서 소라이는, 한문을 일본문으로 바꾸어 읽는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관행―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 온―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저를 읽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일본문으로 바꾸어 읽지 말고, 마치 중국인들이 읽는 것처럼 정확히 본래의 문장 그대로 읽으라고 충고했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모국어인 일본어라는 울타리 그러니까 '쿠루와'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중국어라는 다른 '쿠루와'로 들어가, 결국 일본어와 중국어라는 이중적인 전망을 체득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소라이는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중국어와 일본어라는 '쿠루와' 모두를 객관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