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 해방 직후부터 남북 각각의 단일정부 수립과정까지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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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정치사] 해방 직후부터 남북 각각의 단일정부 수립과정까지에 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해방 직후부터 1948년 남·북 각각의 정부수립 과정까지에 대한 이해

3. 고찰 1 - 한반도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3. 고찰 2 -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4. 결론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유엔한국위원회가 남한의 단독 선거 시행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이 문제를 그대로 유엔소총회에 넘기게 된다. 유엔소총회는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 라는 미국의 단독정부안을 통과시킨다. 이승만세력은 이전과 같이 남한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하지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우익세력은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남한 단독 선거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 끝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시행되고 그 결과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에서도 최고 인민 회의 선거가 시행되어 그 해 9월 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 한 내각이 구성된다. 남북한 각 지역에 독립적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한배호, 『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정치사 : 독재와 반민주의 세월을 넘어』, (일조각, 2009), p. 91-140


3. 고찰 1 - 한반도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당시 38선 이남에는 온건좌파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라는 자치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 여운형의 건준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치안 유지 및 행정활동을 수행한다.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패망이 다가온 사실을 알고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까지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여운형을 지목했고,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준은 공산당 조직망’ 이라는 논리로 단체의 존립을 위협한다. KBS 1TV, 인물현대사, ‘[광복 60년 특집]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1편 여운형’, 2005년, 1월 7일 방송분.

위에서 언급한 여운형 외에도 남한 지역에는 나름의 독립운동을 펼쳐가면서 독자세력을 구축한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시기, 상당수 다른 나라들도 강대국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이 중 무장 투쟁을 통해 성공적으로 독립한 유고슬라비아와 프랑스를 예로 들어보자.
1941년,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무력 침공하고 당시 유고왕정이 무기력하게 항복하자 요세프 티토(Josip Tito)는 80만명의 빨치산을 이끌고 4년여 동안 대 독일 항쟁을 벌인다. 마침내 1945년 전세가 역전되어 독일군의 전력이 급속도로 약해지자 소련군과 합세, 베오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몰아낸 뒤 소련군에게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떠나 달라’고 당당히 요구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후 온통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동유럽에서 그나마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는 국가가 된다. 이대영, 『알기쉬운 세계 제2차 세계대전사 v,6. 천년제국의 최후』, (호비스트, 2002), p.215

참고문헌
(참고문헌 및 사이트)

한배호,『자유를 향한 20세기 한국정치사 : 독재와 반민주의 세월을 넘어』 (일조각, 2009)
이대영, 『알기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v.5, 심판의 날』 (호비스트, 2002)
이대영, 『알기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v.6, 천년제국의 최후』 (호비스트, 2002)
정영훈 외, 『근현대 한국정치사상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회, 2006)
박현, 『100문 100답 한국사산책』 (백산서당, 1994)
김인걸 외, 『한국 현대사 강의』 (돌베개, 1998)
임헌영. 『한·중·일 3국의 8·15 기억』 (역사비평사. 2005), p. 127
김학준, 『1995년 9월 5일자 동아일보 7면
- 광복 50주년 특집 해방공간의 주역 (4) 美점령군 사령관 하지』
서울신문 1945년 9월 11일자 기사

(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http://www.mongyang.org)
KBS 1TV. 『인물현대사. [광복 60년 특집]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 여운형편’
KBS 1TV. 『광복 60년 특별기획 KBS 영상실록, 1946~1948년』
KBS 1TV. 『한국사傳, 제55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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