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이해] 김유정 문학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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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학의이해] 김유정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차례

1. 김유정의 삶
1) 김유정 약력
2) 김유정의 일생
3) 김유정 일생, 자료모음
2. 김유정 작품의 아름다움
1) 김유정만의 리얼리즘
2)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묘사
3) 풍자와 해학
3. 김유정의 문학사적 의의와 그 영향
1) 문학사적 의의
2) 오늘날의 영향
본문내용

서울 생활의 시작

재동공립보통학교 학생시절 1920 12세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형님의 난봉은 더욱 심해지고 집안을 소란스럽게 하는 술주정도 더 심해졌다. 유정에게 낙이란 것이 없었다. 그 맘 때쯤 유정은 글방을 다녔다. 그래도 그때까지 살림이 넉넉하여 다른 근심이 없었기에 글 공부를 더 해서 이상세계로 가고 싶다는 소망 을 가진 것이다.

12세가 되던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은 일본 사람이 발붙이지 못할 만큼 민족 자존의 정신이 강하게 살아있는 명문 사대부들이 살던 지역이었다. 김옥균 최시형 이상재 민영환 등이 이곳 출신 여기서 춘천 실레마을 출신 김유정은 비로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시절 1923
1923년 4월9일 재동국민학교 4학년 졸업과 동시에 검정으로 입학 161명중 27등 상위의 성적 그는 생활이 즐거웠다. 새로운 세계 넓은 세계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나 행동이 조금씩 고쳐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정환경 탓인지 2학년이 되면서부터 173명중 83등 조퇴와 결석이 잦아지며 공부에 흥미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3학년이 되어 더욱 나빠진 성적 특히 일본 식민주의와 관련된 학과의 성적은 더욱 떨어졌다. 당시 휘문고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쟁쟁한 인사들로 짜여 있었다 교사김도태. 유정이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을때쯤 자유로우면서도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이 쏟아지고 있던 때였다. 유정이 후에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고향 실레에서 야학을 열었던 것도 이때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회남과의 우정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이 되어 유정은 안회남과 단짝이 되어 학교를 자주 빠졌다. 두사람이 친하게 된 것도 자유분방한 사춘기의 설레임을 주체할 수 없어 학교를 자주 빠진다는 데서 동류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외로운 두 소년이 서로 결석하는데도 의지가 있었다. 유정은 이무렵 바이올린 하모니카 등을 배웠고 소설읽기 영화감상에 열중했다 아령 야구 축구 스케이팅 권투 유도등도 열심히 하였고 지식에대한 욕구가 높았다. 그는 한창 자아발견에 광분했었다.(그의 조카 영수의 회상에 따르면 다정다감햇고 끝까지 착했던 멱설이는 일찍 부모를 여위 이후 뭔가 부족한 것을 느껴 아무리 배불리 먹고 한껏 호사를 해도 허깃증과 허전함을 금치 못하였다) 형님의 난봉으로 가산이 기울고 그나마 자신에게는 잘해주었다 한들 누님들을 때리고 소란을 피우는 형이 싫었던 유정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 회남이 있었기에 그나마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정서적 불안정. – 문학을 하기 위한 축복? 회남의 김유정전 영광이다 영광이다 아무일 없다 하고 외치며 일기에 까지 기록하여 둔 것은 항상 이러한 위협에 쪼들려 지낸 탓이 아니었던거 한다. 그가 나를 동무하여 함께 학교를 베어 때리기 비롯한 것도 이를 테면 한 개 투쟁의 형식이요 반항의 형식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즐겁고 아름다운시간을 가져 보려는 자연한 노력이었다. 회남의 집 젊은이들의 사랑방에서 YCK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어 매일밤 하모니카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들의 우정은 문단에 등단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유정의 마음속에는 가정과 혈육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증오하는 감정이 불타오르는 듯 하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정과 혈육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가졌다. 이는 그가 방탕하는 못난 형님을 모시고 있지만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데 있다 유정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유정은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1926년 휘문고보를 휴학하게 된다. 1928년 유정의 형 유근은 고향 실레마을로 이사를 가고 유정은 봉익동에 사는 삼촌집에 맡겨진다. 다시 4학년으로 복학 당시 휘문고보는 전국의 영재들이 몰려 들었다.
이후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 삼촌댁에 얹혀지낼 체면도 명분도 없어 사직동 둘째 유형누님 댁으로 거쳐를 옮김 회남과 둘의 만남은 여기서도 이어지고 둘째누님의 히스테리가 있기도 하였다.
1927년 19세 청년 유정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하루 아침에 삼촌댁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절망했던 것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21세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그가 세상을 헤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연희전문학교 학생시절
1929년 삼촌집에서 유형누님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해에 박녹주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박녹주를 짝사랑하고 편지만 열심히 써 보냈다. 그러나 실제로 직접찾아가 만나게 되는건 1930년 22세가 되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이다, 사실 유정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이야기는 알려진 게 잘 없다. 입학 후 2개월이 지나 학칙 26조에 의거 제적 처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카 영수의 회고에 의하면 유정이 더 배배울 것 없다고 선언 하였다고 한다. 사실 그러한 명분 싸움 보다도 유정이 직접 더 많은 지식과 더 큰 세계를 배우기 위하여 연희전문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실 유정은 연희전문학교 가기전 누님의 집에 거처할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할 생각을 하였지만 누님의 간곡한 만류로 남았다. 히스테릭한 발작을 일으키는 누님을 혼자놔두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 대관으로 가 더 큰 세계를 호흡하고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열망이 그를 연희전문학교로 이끌었다.

박녹주를 짝사랑하다.
유정은 어머니를 지극히 그리워했다. 어머니의 사진을 항상 두고 공부를 하였고 그 사진을 볼떄마다 어머니가 유정아 사랑하는 유정아 용기를 내어라 하고 속삭인다고 느꼈다. 안회남에게 늘 어머니의 미모를 자랑하기도 할 정도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였던 것이 또한 유정이다. 속으로는 어머니를 향한 마음과 정성이 날로 더해갔다. 그때 유정의 눈 앞에 나타난 한 여성이 바로 박녹주이다.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마음이 모두 그 여인을 연모하는 데로 전환되었다. 당시 유정은 여성에게 사랑받는 것보다도 사랑을 주는 정열에 불타올랐다.
조카 영수의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