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
 2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2
 3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3
 4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4
 5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5
 6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6
 7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7
 8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8
 9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9
 10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0
 11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1
 12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2
 13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3
 14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4
 15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5
 16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6
 17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7
 18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8
 19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19
 20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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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하와이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하와이

1) 하와이에서 발생한 단체들

(1) 리후에 한인감리교회
(2) 대조선 국민군단병영
(3) 동지촌
(4) 대조선독립단
(5) 대한인국민회
(6) 재미한족연합위원회

2) 하와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 박용만
(2) 이승만

3. 미국본토

1) 미국에서 발생한 단체들

(1) 흥사단
(2) 공립협회
(3)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2)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 안창호

4. 맺음말

본문내용
한편 하와이 한인 사회를 발전시키던 박용만은 1913년 2월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이승만을 교육과 출판 사업에 힘써달라고 하와이로 초청했다. 뿐만 아니라 ≪신한국보≫를 통해 이승만을 “찬란하게 소개하여 일반 동포의 동정심을 환기”시킬 정도로 의형에 대한 그의 예우는 극진했다. 그러나 1913년 박사학위를 받고 배회하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하면서부터 둘의 관계는 의형제에서 ‘정적’으로 변질되었다. 이승만의 초빙은 박용만에게 치명적인 아픔을 안겨 준 시초였다. 하와이에 온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하와이의 지도자인 박용만에 대한 음해공작을 감행했다. 즉 1915년 국민회관 건립기금 사용출처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자 이승만은 박용만의 지지세력인 국민회장 김종학을 공금횡령죄로 체포하고 자신의 지지파인 정인수를 임시총회장으로 임명하여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김종학이 3개월 만에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지지파인 소위 혁명당원들은 박용만파 대의원을 구타하는 등 테러를 자행하여 당시 호놀룰루 영자신문에 종종 보도되곤 하였다. 이러한 보도는 일제에게 한인사회 분열책동의 호재로 작용했다. 박용만의 무장투쟁 일변도의 활동이 항상 신경 쓰였던 일제는 1915년 여름 일본 주미공관에 명령하여 미 국무장관에게 박용만의 활동에 대해 강력히 항의토록 하였다. 이에 미 국무장관은 내무부에 엄중 조사를 요구했고, 미국 내무부는 다시 하와이 총독에게 공문을 보내 박용만과 그의 추종자들의 무기 소유 여부와 일본내정에 간여하여 반란을 선동하고 있는지 등을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와이 정부가 한인사회의 특별경찰권을 취소함에 따라 한인사회의 자치권은 상실되었으며, 대조선국민군단 역시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들 닫는 등 이후 하와의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1915년 6월 박용만은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 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해 7월 테러와 기습으로 하와이 국민회를 완전 장악한 이승만은 박용만에게 “자신의 옛 옥중동지를 잊지 않고 친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 단 자기편이 되든지 저쪽편이 되든지 선택하라”고 계속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는 한편, 1916년에는 박용만을 ≪국민보≫ 주필로 재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하와이 한인사회 내에서 박용만이 차지하는 위상을 무력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계략이었으나, 박용만은 한인사회를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박용만 제거공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국민회를 주무르던 이승만이 1918년 2월 예산집행이 문제되어 문부조사를 받기에 이르자, 오히려 문부조사요원을 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