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가론] 고산 윤선도 문학관, 시조 작품분석, 한시 작품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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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작가론] 고산 윤선도 문학관, 시조 작품분석, 한시 작품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윤선도의 생애
2. 윤선도의 문학관과 학문적 경향
3. 시조 작품 분석
3.1. 정치적 좌절의 미적 반영
3.2. 자연과의 교감, 그 감수성의 청정한 유로
3.3. 강호미학의 고도의 발현, 어부사시사
4. 한시 작품 분석
4.1. 이분법적 세계인식과 현실지향의 의지
4.2. 자연친화적 태도와 심미적 몰입
4.3. 일상적 사물에의 성찰과 삶의 관조
5. 결론


본문내용

1. 윤선도의 생애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는 선조 20년에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尹惟深)과 순흥 안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자(子)는 약이(約而)며, 호(號)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은 해남 윤씨의 거대한 물적 기반을 지닌 인물이었다. 윤효정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해남 정씨 귀영의 딸을 처로 맞이하였다. 이후 장자 상속을 통해서 부(富)를 집중적으로 증식함으로써, 고산대에 이르면 해남 윤씨 가문은 국부(國富)로 불리기까지 한다. 여기서 고산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중요한 전환점이 일어난다. 고산이 8세 때 그의 숙부인 강원도 관찰공 윤유기(尹惟幾)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해남 윤씨 가문의 장손이 된 것이다. 이로써 고산은 해남의 대지주가 되어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문의 정치적인 위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고산이 살았던 17세기 전·중엽은 정치적으로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에 따른 학파 간의 대립 관계로서 출발하였던 붕당 정치는 점차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하여 갔다. 고산이 정계에 진출한 시기인 광해군의 재위 중에는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인이었던 고산의 가문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26세(1612, 광해군 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고산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왕권 강화, 그리고 북인과 서인의 타도를 주장하며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30세인 1616년(광해군 10년)에 고산은 당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이이첨(李爾瞻)의 전횡(專橫)을 비판하는 상소인 를 올린다. 이를 이유로 정치적으로 패배한 고산은 함경북도 경원과 경상남도 기장으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일은 고산의 강직한 정치적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직선적 성격을 드러내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7년 후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이 무너지자 고산은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게 된 서인 중심의 중앙 정계에서 남인의 위치는 여전히 좁을 수밖에 없었다. 고산 역시 서인들의 견제로 겨우 금오랑을 제수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 고산은 사직하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후에도 고산은 계속해서 의금부도사, 안기찰방, 사포서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산은 42세(1628, 인조 6년)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를 하면서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당대 유력한 정치가였던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의 천거를 받고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師父)에 제수되었던 것이다. 이후 약 5년 동안 고산은 공조좌랑과 한성부서윤, 시강원문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가장 득의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의 견제를 견디지 못하고 고산은 1634년(인조12년)에 48세의 나이로 성주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해남에 은거하기에 이른다.
해남에 은거하고 있던 고산에게 두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다. 50세(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 소식을 듣고 고산은 가복(家僕)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된 뒤였다. 고산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으로 향했으나,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淸)에 항복하면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고산은 세상을 영영 등지겠다는 생각으로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도중에 고산은 보길도를 발견한다. 보길도의 수려한 자연 풍광에 매료된 고산은 이곳을 은거지로 삼고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보길도의 산간 지역에 위치한 부용동(芙蓉洞)은 그 산세가 연꽃처럼 포개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하여「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등과 같은 고산의 대표적인 작품이 모두 보길도에 은거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임을 볼 때, 보길도의 발견은 고산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고산은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렸을 당시에 조선의 항복 소식을 듣고도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를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서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죄가 되어 2년 후인 1638년에는 1년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해배(解配)된 후 해남에서 은거하던 중에 고산은 금쇄동(金鎖洞)이란 곳을 발견한다. 이후 약 17년간 고산은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은거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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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자,『시조문학 연구론』, 국학자료원, 2003
정운채,『윤선도-연군지정과 이념의 시세계』,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5
김흥규,「어부사시사의 종장과 그 변이형」, 고산연구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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