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실학과 문학,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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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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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1 실학의 개괄적 특징
1.1 한국 실학 사상
1.2 실학파
1.3 다산 실학

02 실학파 문학과 다산 정약용
2.1 실학파 문인의 사상적 지향
2.2 현실주의적 문예관과 주체적 미의식

03 다산의 생애와 문학
3.1 유년기 - 출생과 재능 / 성호학파와의 만남과 천주교 신앙
3.2 사환기 – 정조(正祖)와 함께한 실학적 실천 / 민(民)에 대한 관심
3.3 유배기 – 민중의 삶 / 제자들을 가르치며 / 가족을 생각하며 /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3.4 노년기 - 노화와 죽음에 대한 인식과 회한 /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04 정약용 문학의 의의와 영향
본문내용
한국 실학 사상

중국 – 명나라 말기 서구 과학 기술과
청나라 초기 고증학의 결합으로 실학 도래

한국 –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도래

도학과 주자학의 관념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
에서의 민생문제, 사회문제를 참답게 해결하고
다 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


성호학파를 학문적 연원으로 함
서학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수용
청대(淸代)의 고증학적 요소까지 가미

→ 인간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가치관 제시
(경세학)


시부(時賦) 위주 사장지학의 문제점


중국 중심 화이관을 기반으로 한 주자학에 배타적으로 집착


현실과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춤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세상을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 非詩也. 不傷時憤俗 非詩也.) 「寄二兒」, 『여유당전서』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 「기민시」, 「시랑」

주체적 입장
근래 수십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의가 있으니 이건 동방문학을 아주 배척하는 일이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손도 대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병통이 아니고 무엇이냐. 사대부 자제들이 우리나라의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론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설사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저절로 소홀하고 거친 것이 될 뿐이다. 「寄二兒」, 『여유당전서』


출생과 재능
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
절간으로 드는 길 분명찮은데,
응달에는 묵은 눈 쌓여 있고
물가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
샘물은 돌구멍에 솟아오르고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 퍼지네.
유람길 예서부터 두루 밟지만
돌아오리라는 기약이야 어찌 그르치리오.

성호학파와 천주교와의 만남
15세 혼인과 부친의 복귀로 서울로..

이벽, 이승훈, 이가환과의 만남

성호학파 선배들을 따라 성호 이익의 사상과 저서를 접함


…이 때 이가환이 학문으로 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매부 이승훈이 또 몸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모두 성호 이선생 익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였다. 성호의 유저(遺著)를 보고는 혼연히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 『自撰墓誌銘』

“공(茶山) 16세. 성호 선생의 유고(遺稿)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 때 일세의 후학들이 이선생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공도 이를 준칙으로 삼았다. 항상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꿈 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고 하였다.” 『사암선생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