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경제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본 조선의 문제점 일본과 비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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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본 조선의 문제점
- 일본과 비교를 중심으로
세계는 여러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발전해왔고 지금도 발전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가며 발전해온 것이다. 그 과정 중에 근대화가 있고 우리나라 역시 근대화시기를 거쳤다. 우리나라는 서양뿐만 아니라 인접해 있는 일본, 중국 보다 근대화가 늦었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근대화가 빨랐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발전을 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왜 늦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나라보다 근대화가 빨랐던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문제점을 짚어보려 한다. 우선, 동양의 근대화는 공통적으로 서양의 개국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서양의 개국 강요에 대해서 양국의 대응을 비교해 본다. 그리고 개국 이후의 상황을 살펴본 다음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는 태도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서학을 받아들여서 자국의 교육으로 전환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서양의 개국 강요에 대해서 양국의 대응을 살펴보자. 일본은 개국의 시기가 1854년에 체결된 미일화친조약이었다. 즉,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의 나라들 중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1882년에 비해 약 30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내항했을 때와 같이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 와서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미국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을 때의 대응과 조선이 일본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을 때의 대응이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미국의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4년의 애매하고 복잡한 교섭과정을 통해서 자기들의 요구를 끝까지 주장하고 끈질기게 버텼지만 조선은 논의다운 논의도 없이 그냥 불평등조약을 체결해버렸다. 예를 들면, 조선은 수입 관세가 8%인데 반해서 일본은 20%이고 그 외에도 개방항구에 창고를 지을 권한을 외국인에게 허락해 줄 것인지, 내륙까지 외국 상인이 영업하는 것을 허락 할 것인지, 연안 해운업을 외국인에게 허락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모두 이권을 지켜냈지만 조선은 이것들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http://web.gesomoon.com/zboard/zboard.php?id=politic&no=101475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원인을 찾아보면 지배층의 통상에 대한 사고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지배층들과는 다르게 조선의 사대부들은 통상조약의 핵심이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한 통상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유교에서는 “의(義)를 바르게 하고 이(利)를 도모하지 않는다. 도(道)를 명확히 하고 공(功)을 계산하지 않는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덕치(德治)’에 대해 말해야 하고 주산을 놓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하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미천한 장사치나 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개국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 있는데 중국의 ‘애로호 사건’이다. 여기서도 일본과 조선의 대응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청국 관리가 영국 국적의 애로호를 임검하면서 국기를 모독했다는 구실로 발생했다. 이에 영국은 군대를 출병시켰으며 프랑스도 선교사가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합류하여 마침내 북경까지 점령하게 된다. 이 때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에서 승리한 후에 일본에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일본 주재 미국총영사 해리스의 통상조약을 받아들인다. 즉, 미일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면 미국은 그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흥성대원군은 천주교도와 서양의 내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빨리 이를 징치하지 않으면 열하의 화(禍)가 장차 우리에게 닥친다”며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을 뿌리 뽑기 위해 대탄압을 벌인다. 그것이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병인양요).
개국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역시 일본과 조선은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개항 이후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비록 폭력적인 방법이었다 하더라도 보수층을 일소하고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지도층이 근대화를 추진력 있게 진행해 나갔다.(물론 개혁인사들이 암살을 당하는 등의 많은 잡음이 있기는 했다.) 그에 비해 조선은 개국 이후에도 국론이 척화와 개화로 분열되어 근대화가 지지부지하게 된다. 만인소 사건 등 척화운동이 계속되어 국론을 통합시키지 못했고, 갑신정변이나 동학운동 같은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개혁이 청이나 일본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해 이루어져서 정작 우리를 위한 개혁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선 스스로의 자발적인 개혁을 위해 세운 교정청을 무력화시키고 자기들 편할 대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어간 일본인들의 공작도 한 몫 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근대적인 마인드를 가진 지도층이 없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개혁적인 리더가 명성황후였는데 을미사변으로 인해 일본에게 시해를 당한다. 근대화를 이루겠다고 출범한 대한제국도 헌법이라는 대한제국 국제에서 보듯 전제왕권을 표방하여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등 제대로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9338138&qb=67O07IiY7Li17J2EIOydvOyGjO2VmOqzoA==&enc=utf8§ion=kin&rank=1&sort=0&spq=0&pid=fyxtXsoi5TwsssqwflNsss--084886&sid=SyxBNZQJLEsAAGSYcy4
다음으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는 태도의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일본과 조선은 공통적으로 서교를 탄압했었다. 일본에 서교가 들어온 시기는 조선보다 빨랐고 서교를 탄압한 시간이나 그 규모면에서도 조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본은 무역이나 학술 등 자국의 수준보다 발전한 학문들을 종교와 같이 탄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1720년에 도쿠가와 요시무네 장군이 서양서 중에서 서교와 과학을 분리하여 과학서 수입을 해금하였다. 그리고 난학을 배우게 하여 일본인에 의한 난학의 길을 열었다. 그래서 일본은 네덜란드어-일본어 사전을 만들 정도로 서양의 학문을 수용했다. 그리고 일본은 양학을 연구하기 위한 국가기관으로서 1811년 천문방에 ‘번서화해어용(蕃薯和解御用)’을 두는 것을 시작으로 1863년에는 ‘개성소(開城所)’로 발전시킨다. 이것이 양학 수용을 통한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 된다.
하지만 조선은 반서교, 반서양 사상을 내세우며 서양이라면 반대하고 탄압하기 바빴다. 이익 등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무분별적인 서양배척이 아니라 동양과학보다 뛰어난 서양과학의 수용은 결코 유교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재야학자의 사상에 불과했고 국가적 차원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조선의 과학은 뒤처지게 된다. 특히 기술 분야로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면직물 만드는 기계가 문익점 시절에 들여온 형태에서 기본 개량만 겨우 몇 번 거친 상태였다. 최무선이 최초로 함포를 사용하고, 세종대왕 때 장영실이 세계를 상대로 뒤지지 않을 장치들을 만들던 시절과 비교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http://web.gesomoon.com/zboard/zboard.php?id=politic&no=101475
마지막으로 서학을 받아들여서 자국의 교육으로 변환하는 방식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일단 근대적 교육의 전제가 된 전근대의 교육을 보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공통적으로 유교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조선에는 유교교육의 총본산인 성균관이 있었고, 일본은 이에 해당하는 창평횡(昌平)이 있었다. 그 밑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은 한성의 사학 및 328개의 부군현의 향교가 있었고 일본은 번교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 조선의 유교교육은 주자학 일색이었는데 반해 일본은 다양하였고 또 무술을 첨가하여 심신을 같이 단련시킴으로써 문무가 겸비된 교육을 추구했다. 막부의 ‘무가제법도’에는 “문을 좌로 하고 무를 우로 하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온 법이니 그 둘을 겸비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사학(私學)으로서 조선의 서원에 해당하는 것은 일본의 사숙이고, 민간의 서당의 해당하는 것이 일본의 데라코야(寺子屋) 서민을 위한 교육시설. 주로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다. 데라코(寺子)는 6~13세의 어린이.
이다. 조선의 서원은 유교 일변도였고 이에 비해 일본의 사숙은 물론 한자숙이 중심이었지만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계산법과 의학을 가르치는 서양숙이 대두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서양학문을 탄압했던 사건(시볼트 사건 1828년 독일인 의사 시볼트가 국법으로 금지되었던 일본지도를 다카하시 가게야스에게서 입수한 것이 발각되어 일어난 사건. 시볼트는 국외로 추방되고 다카하시는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