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

 1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1
 2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2
 3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3
 4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4
 5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5
 6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
목 차
Ⅰ. 머리말
Ⅱ. 폐모살제(廢母殺弟)
Ⅲ. 중립외교
Ⅳ. 궁궐 재건 사업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직후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내린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庶母)를 죽였고, 이에 여러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둘째,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셋째, 기미년(광해군 11)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에게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 지시했고, 끝내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pp.35~36.
이 교서는 같은 날 인조가 내린 교서와 내용이 같다.
오늘날 광해군을 두고 폭군인가, 현군인가 하는 논쟁이 뜨겁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는데, 이는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西人) 일파가 조선후기 내내 집권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20세기에 들어와 시작되었다. 17세기 초만 명·청 교체기에 이른바 ‘중립외교’, ‘실리외교’를 통해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를 폐모살제, 중립외교, 궁궐 재건사업의 세 가지 측면으로 살펴보면서 그 생애와 시대상황을 다시 살펴 광해군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약간의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Ⅱ. 폐모살제(廢母殺弟)
선조는 병상에서까지 후계 확정을 미루다 결국 죽음이 임박해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린다. 그러나 당시 권신이었던 유영경(柳永慶) 1550(명종 5)∼1608(광해군 즉위년). 조선 중기의 상신(相臣). 1608년 선조가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영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2015.06.15
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계승을 교란시켰고, 결국 정비였던 인목대비가 언문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성을 인증하고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던 셈이다. 이렇듯 즉위부터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 문제는 계속 광해군을 괴롭혔고,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의 시위도 적지 않았다.
광해군의 패덕(悖德)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입에 담게 되는 것이 폐모·살제라는 말이다. 페모란 모후(母后)인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감금한 일이며, 살제는 이복아우이자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에 귀양 보냈다가 쪄 죽인 끔찍한 일을 일컫는 말이다. 광해군은 한 때의 국구(國舅)였던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종사를 도모했으며, 이에 인목대비가 수렴청정을 자청하였다는 공초(供草)를 읽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은 김제남을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는 명을 내린 데 이어, 영창대군에 대한 치죄(治罪)를 명한다. 그리고 다시 김제남을 사사(賜死)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김제남은 결국 사약을 마셔 향년 52세에 죽음을 맞았다. 곧 영창대군은 아홉 살 어린 나이로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곳에서 영창대군은 손톱이 까맣게 탈 만큼 방안에서 쪄 죽었다. 신봉승, 「폐모 살제의 진상」, 『한글한자문화』 139권0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11, pp.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