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조선의 해방은 조선 민중의 손으로 1930년대 이후 중국 관내 및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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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조선의 해방은 조선 민중의 손으로 1930년대 이후 중국 관내 및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의 해방은 조선 민중의 손으로!!
- 1930년대 이후 중국 관내 및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
- 목 차 -
Ⅰ. 머리말
Ⅱ. 1930년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Ⅲ. 1930년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발전을 구가해 온 열강에게 일대 타격을 안겨 주었다. 세계 경제체제의 구도를 블록경제체제와 이에 대립하는 파쇼체제로 몰고 가면서 위기를 고조시켜갔다. 여기에 사회주의 진영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1920년대 민족 진영과의 연합전선을 버리고 대중적 노동계급에 기반을 수립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해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계공황과 특히 농업공황을 맞은 일제는 군국파시즘체제로 전환하고 대외 군사침략에 자국 독점자본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 타개책으로 1931년에 만주를 침공하여 괴뢰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었다.
1930년대 독립운동은 이와 같이 군국주의적 지배가 압박되는 객관적 조건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만주와 중국 관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국외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Ⅱ. 1930년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1930년대 초 중국관내 조선인 민족해방 운동가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먼저 들 수 있는 세력은 ① 자신들의 노선을 반일 반공으로 잡고 있는 보수민족주의 세력 ② 이와는 정반대로 아예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을 위해 투신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 ③ 의열단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 ④ 운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사태를 관망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은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중국 내의 국공분열의 상황 속에서 분열과 전반적인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민족유일당운동의 좌절을 딛고 새로운 항일 진로를 모색하던 한인 독립운동세력에게 국면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중국인들의 항일구호는 높아졌고,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반만항일의 한중 연합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러한 정세변화를 배경으로 1932년 10월 김규식, 최동오, 이유필 등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고,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이 참가하지 않았고, 단순한 연락기구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 당의 해소와 단일당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한국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 등 다섯 당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혁명당은 김구일파와 임시정부고수파들의 불참으로 중국관내 민족해방운동세력 전체를 망라하지는 못하였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게다가 가맹세력간의 성향노선상의 차이로 진통을 겪은 후,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국공합작 등 변화된 정세 속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전선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전선통일운동은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등 우파민족주의자들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년 7월)를, 민족혁명당해방동맹혁명자연맹사회주의무정부주의계열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여 결국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중일전쟁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남경정부는 상해와 남경을 점령당하고 결구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민족전선연맹 측 민족혁명당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대결성을 제안하였다. 모든 조선인이 참가한다는 조건으로 임시정부계열과 당을 이탈했던 조선청년전위동맹(1938년 9월 이탈)에 참석을 요청했으나, 임시정부계열은 거부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계열은 참가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창설되자마자 무한방위전에 참가하여 대적심리전적후 공작활동중국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면서 많은 전과를 이루었다. 의용대는 중국관내에서 탄생한 최초의 조선인 부대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39년 국민정부의 합작권유로 다시 두 진영은 7당 회의로 협상에 임하였다. 여기에는 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혁명자연맹해방동맹 등 민족전선 측 4당과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광복연합 측 3당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통합형식을 둘러싸고 연맹방식을 주장했던 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이탈하였고, 남은 5당 회의에서도 당원의 자격문제, 토지 국유화 등의 문제로 결국 결렬되었다. 그 후, 우파민족주의자들은 1940년 3월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그해 9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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