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에 대하여

 1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1
 2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2
 3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3
 4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4
 5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5
 6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청마 유치환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청마(靑馬) 유치환에 대하여
1. 생애 (1908~1967)
청마는 1908년 7월 14일 경남 통영에서 유생인 유준수의 8남매 중 2남으로 출생했다. 형은 극작가 동랑 유치진, 바로 아래의 아우는 시인 유치상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도일하여 도쿄 도요야마 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귀국하여 1926년 동래고등학교 5년에 편입하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기독교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아 1년 만에 중퇴했다. 1929년 통영초등학교 동창생 권재순과 혼인하여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당시 유행하던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작품에 공감하고 정지용의 시에 감명을 받아 유치진과 함께 고향에서 1930년 회람잡지 《소제부》를 만들어 시를 발표했다. 1937년 《문예월간》 제 2호에 시 첫 시집『청마시초』에 수록되어 있다.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 최상규, 장응두, 염주용, 박영포, 유치상, 최두춘, 김기섭을 회원으로 함. 5집까지 발행했다고 하나, 1집ㆍ2집의 소장자는 박문하, 3집~5집은 미상이다.
를 부산에서 간행하였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초기의 대표작인 등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40년 북만주로 이주하여 농장을 관리했는데, 그 곳의 벌판을 배경으로 ‘허무와 의지’의 시를 쓰게 된다. 등 그의 제 2시집인 『생명의 서』에 수록된 시들이 이때의 소산이다. 1945년 6월 말 다시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10월에는 통영여중 교사가 되었다. 1947년 등 59편을 모아 『생명의 서』를 펴내고 청년문학가협회 제 21회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1948년 제 3시집 『울릉도』를 발간했다. 1949년 제 4시집 『청령일기』를 계속 펴냈으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제 3사단에 종군하였다. 1951년 9월에는 직접 목격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종군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엮고, 1953년 고향으로 돌아가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을 발간했다. 1954년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또 초대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이 해 10월에 『청마시집』을 발간, 1955년 경주 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제 1회 경북문화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고 그 해 12월 『제 9시집』을 발간했다. 1958년에 제 5회 자유문학상 수상, 12월에 『유치환시선』을 발간했다. 1959년에 수상집 『동방의 느티』,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발간했다. 이 해 자유당 말기라는 현실 속에서 비판적 교육자로 미움을 사 교장직을 내놓게 된다.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에 419혁명의 도화선의 하나가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저항시 를 발표하여 더욱 심한 감시를 받게 된다. 같은 해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고, 1961년 경주 여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2년 제 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고 대구여고 교장으로 옮겼다. 1963년 수상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경남여고 교장으로 옮겨서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발간했다. 1966년 부산 남녀상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간행하였다. 1967년 2월 13일 청마는 예총 모임에 참석했다가 귀가 도중 부산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 시적 경향
1) 생명파
 정지용·김영랑·박용철 등이 중심이 된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적이며 감각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인간의 정신적·생명적 요소를 중시하는 경향을 추구했던 일단의 작가군을 말한다. 1935년대의 서정주 등이 중심이 된 《시인부락》의 동인들이 이러한 문학적 특질과 그 방향을 추구하였다. 주요작가로는 서정주를 비롯하여 함형수, 김동리, 오장환, 김광균, 김달진, 여상현 김상원, 김진서 등이 있다. 유치환은 《시인부락》의 동인들과 시적 태도의 유사성으로 인해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명파로 묶이는 서정주, 오장환, 김동리, 유치환 등의 시에서는 강렬하고 독특한 본능적인 욕구, 도덕적 갈등, 시대의 인식 등이 함께 융합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유치환은 형이상학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주적 교감과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하면서 시대의 불행도 함께 의식한 시를 썼기에 우리 현대 시사에서 인생과 사회의 부조리에 윤리 의식으로 대결하며, 형이상학적 지향을 보인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유치환은 「시인부락」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서정주와 비교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선, 생명 인간과 인생 자체의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두 시인은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주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본능적 욕망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 주는 데 반해, 유치환은 생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허무와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 시의 부정
 당대의 그 어떤 시인보다 많은 총 14권의 시집을 출간한 청마 유치환은 정작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술회를 하였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