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당 삼의당 생애 삼의당 시 문학적 배경 삼의당 시 내적 요인 삼의당 시가 문학적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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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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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삼의당의 생애
삼의당은 전라도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영조45년(1769)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연산대의 학자인 김해김씨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인혁(仁赫)의 딸이다. 여성에겐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까닭에, 성씨 이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친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三宜堂槁」에 수록된 시에 따르면 몰락한 사대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제가(諸家)의 시나 글을 대략 보았다고 밝혀, 규수 시절에 이미 시를 지을 수 있는 바탕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출가 전의 작품으로 보이는 , , 등으로 그가 어떤 공부와 생활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서 “曾讀內則篇 (일찌기 내칙편을 읽었고) 憎知家門政 (집안 다스리기 익히 알았네)”라는 구절로, 이미 삼의당은 내칙편을 읽어 부도(婦道)를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추었으며, 부분부분 시경의 소남편(召南篇)을 인용하여 시를 짓고 있어, 학문이 보통을 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모습은 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논어와 시경을 읽어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동시에 시작(詩作)의 기틀을 미리 다져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의당은 18세 되던 해에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갈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결혼했다. 그는 첫날밤 남편과 시를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삼의당과 담락당과의 부부관계는 원만하면서도 금슬이 극히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씨 가문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벼슬이 끊기어 낙향한 양반이었다. 담락당은 총명하며 선량하였고, 재능과 외용과 언사가 뛰어나 대인관계가 원만했다. 여성에 대한 인식 또한 당시 사회의 사고와는 달라, 부인 삼의당에 대한 태도는 일방적 부도(婦道)의 강요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우애의 관계로 이어졌다. 또한 삼의당은 「晋陽河氏 孝子傳」에 등제된 유일한 여성으로 총명하고, 여성으로써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의리나 사기(辭氣)에도 대장부가 미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어려서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여 문장이 허난설헌이나 이옥봉을 능가하다는 칭찬을 받고 있으니 누구나 그의 학식 수준을 인정했다.
삼의당은 담락당을 과거에 등과시켜 몰락해 가는 하씨 가문을 일으켜 명성을 떨치고,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 남편을 격려하였다. 또한 공부함에 있어 시골의 글방보다는 조용한 암자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권유하면서 격려하는 일화를 써서 보내는 등 남편이 공부를 하도록 여러 가지로 내조하고 온갖 방면으로 애를 썼다.
담락당이 뜻을 세우기 위해 처음 한양으로 올라갈 때, 넓은 견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남편이 넓은 식견을 갖고 웅대한 포부를 갖도록 조언했다. 또한 담락당을 대신하여 집안의 기둥으로서 시부모의 봉양을 잘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잘라 남편의 경비를 대는 헌신적인 내조도 하였다. 삼의당은 시부모의 봉양을 자신이 맡을 것이니 집안 걱정을 말고 빠른 시일에 입신하여 돌아올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담락당은 번번이 과거에 낙방한다. 그때마다 삼의당은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으며, 남편을 격려하며 재기할 것을 권유한다.
담락당이 수차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실패하자 가세는 점점 기울어 질 수밖에 없었다. 10년에 가까운 기간(1788-1796)을 담락당을 한양에 머물러 과거 공부를 하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농사지을 농토마저 없었다. 결국 담락당은 이사를 결심하고 삼의당의 동의를 얻어 신유년(1801) 12월 진안 마령 방화리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집을 지어 주거를 확정했다. 그러나 가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갑자년(1804) 3월 그의 시아버지가 상을 당하였을 때는 빚을 내어 초상을 치룰 정도가 되어, 전답을 팔아 갚고자 하였으나 박토라 살 사람이 없었다.
삼의당 시가의 생활 여건은 경제적인 면에서만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부의 여인에 대한 남다른 경계가 그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였다. 그의 시부 봉촌(鳳村)은 여인의 말은 骨肉을 나뉘게하고 여인이 사용한 계획은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삼의당은 이런 여성관을 가졌던 시부를 모시고 봉양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런 생활여건은 작품을 쓸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