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전후사의인식 노동자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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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전후사의인식 - 노동자, 여운형
해방 전후 노동자와 여운형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해방 후, 계속해서 여운형이 살아있었다면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까? 좌우합작이 가능했을까? 왜 분단국가가 수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다른 길은 없었을까?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분단국가가 아니라, 통일국가를 수립할 수도 있었던 60년 전의 상황을 돌아보는 것은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현재에도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처음에는 조별토론보고서에서 사용했던 1인칭 관점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했으나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힘들어, 시대별로 ‘노동자’와 ‘여운형’의 모습을 조사하고 때에 따라 1인칭 관점을 더해서 시대마다 사건마다의 객관적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힘썼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수의 책과 논문을 참고했으며 특별한 인용이 아니면 각주는 따로 달지 않고 참고문헌에 모두 나열했다. 참고문헌을 인용할 때도 ‘나의 말’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노동자의 삶을 알아보고 여운형의 삶을 알아보고자 한다.
□ 해방전후시기의 노동자
1. ~1910년대 - 토지조사사업, 조선회사령공포
1910년대 노동자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정치의식이나 조직에서도 아직은 초보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파업투쟁과 초보적인 노동자 단체를 만들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노동단체들은 개항 뒤 제국주의 자본이 일찍 침투했던 부두, 광산, 철도 등지에 형성되었던 부두노동자, 화물운반부, 지게꾼과 같은 자유노동자들 사이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1905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전국 노동자 조직은 30여 개로 늘어났다. 이들 노동단체는 대개 서로의 생활을 돕거나 직업을 알선하는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그 의미는 컸다.
“1910년대, 내가 20대를 살았던 때지. 처음에는 차별받고 힘들어도 제도적으로 마땅히 불만을 표출할 수단이 없었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던 거지. 사실 먹고살기 바빠서 파업이나 이런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 그러던 것이 시간이 좀 지나니깐 주변에서 노동단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더라고. 물론 나도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였기에 가입을 했지. 우리가 조직적으로 주기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에서 당시 노동단체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1910년 이래 일제수탈의 최대의 피해자인 농민과 노동자들의 성장과 진출은 2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강력한 투쟁주체의 등장을 보여준다.
2. 러시아 혁명과 31운동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국내에 수용되었다. 31 운동 뒤에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자 지식인청년학생선진 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러 서클을 만들었다. 노동침목회, 노동회, 노우회 같은 지역합동 노조를 만들었으며, 인쇄직공, 철공, 고무직공처럼 좀 더 숙련을 요구하는 직종에서는 직업별 노조를 만들었다.
1924년에는 전국 260여 노동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했다. “우리는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과 투쟁”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의 대립은 조직이 잘 운영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같은 조직으로 아울렀다는 것은 조직에서 큰 한계였다.
1920년대에 노동자 조직이 발전하는 것과 발을 맞추어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최초로 대규모 연대파업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파업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23년 경성고무여공 300명은 회사가 임금을 깎고 공장 감독이 인권을 짓밟자, 굶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까지 맺어 파업했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가면 파업 기간과 참가인원 수가 크게 늘고 파업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