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한글창제와 조선시대 국문문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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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한글창제와 조선시대 국문문학의 발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글창제와 조선시대
국문문학의 발달
● 목차
Ⅰ. 들어가며
Ⅱ. 훈민정음 창제
1. 훈민정음 창제의 의도와 의의
2.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 문학 발달
Ⅲ. 훈민정음과 서사시
1. 龍飛御天歌
가. 龍飛御天歌의 명칭
나. 용비어천가의 성격과 창작 경위
다. 찬술동기
2. 月印千江之曲
가. 월인천강지곡
나. 월인천강지곡의 창작경위
다. 찬술동기
3. 훈민정음과 서사시
Ⅳ. 언해, 번역 사업의 전개
1. 유학 경서의 언해와 두시언해
가. 백성의 교화
나. 유학경서의 언해
다. 두시언해
2. 불경 언해
가. 불경 언해의 양상
나. 불전소설의 언해
3. 국문소설의 시작과 중국 소설의 번역
가. 국문소설의 연원
나. 중국 소설의 번역번안
1)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2)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
3) 삼언(三言)이박(二拍)
4) 이적선취초혁만서(李謫仙醉草蠻書)
5) 금향정(錦香亭)
Ⅴ. 나오며
Ⅰ. 들어가며
조선 전기문학은 앞 시대인 고려 후기와 이질성보다도 동질성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하겠는데, 그 이유는 고려후기에 신흥 사대부가 모색하고 주장하던 바가 조선 전기에 와서 구현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신유학 사상이나 한문학이 그랬을 뿐만 아니라, 경기체가, 시조, 가사 등에서도 지속성이 인정된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1982, p.241
특히 조선 전기의 문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는데 이는 새로운 표기수단에 의해서 국문 문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의해서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표기하게 되었으며, 더불어 문학 작품에 이용하자는 나라의 시도가 있었다. 훈민정음에 의한 국문 문학의 발생과 정착된 이후 형성된 여러 갈래의 문학의 발전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훈민정음 창제
1. 훈민정음 창제의 의도와 의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1443년(세종 25년)에 창제하고,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한 국문 문자는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으며, 세계 문자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훈민정음이 사용되자 문학사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나, 그 점을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조할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은 한문을 대신하는 글이고, 한자에 의한 국어 차자표기를 대신하는 국문이라는 두 가지 의의가 있으며, 기록문학의 성장에서 한문학의 등장, 차자표기문학의 시작에 이어 세 번째로 국문문학의 전환 가능성이 일거에 마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문 및 한자 차자표기에 맞서서 국문이 관장 영역을 확대하고 마침내 그 둘을 퇴장시키기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1989, p.258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던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 되는 문제이다. 훈민정음이 창제 당시에 지배층인 사대부를 위한 문자는 아니었다. 사대부는 한문으로 높은 수준의 문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더러 불편을 느낀다 하더라도 새로운 문자를 창제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한문을 아느냐 하는 것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갈라놓는 기준이므로 상하층이 함께 사용하는 문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 뒤에도 사대부는 한문을 계속 사용했으며, 한문을 쓰느냐 아니면 언문을 쓰느냐에 따라서 문화적인 자격에 의한 지체 판가름이 지속되었다. 중세적인 사회관계와 사고방식이 이어지는 한 한문을 버릴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백성을 통치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을 역사적인 임무로 깊이 자각해야만 했다. 고려 후기에 무신란 몽고란을 겪은 다음에 하층 민중이 지배질서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계속 일어나 마침내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왕조 창업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새 왕조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민중에게 양보를 해서 생업을 안정시키는 한편, 민중을 이념적으로 순화시켜 지배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방침을 택했는데, 그러한 방침이 훈민이고, 훈민을 위한 문자가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농사기술이나 질병 치료법도 가르쳐야 했지만, 더욱 긴요한 과제는 이념 교화였기에 훈민정음에 관련한 그 방면의 책을 펴내는 데 더욱 힘써 이용하고, 임금의 말을 알리는 교서(敎書)나 윤음을 훈민정음으로 적어 펴내야 했다. 조동일, 앞의 글, pp.259-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