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영 - 생애 & 정경과 풍물묘사의 구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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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만영 - 생애 & 정경과 풍물묘사의 구체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장만영
Ⅰ. 생애
장만영은 1914년 음력 1월 25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영천리 87번지에서 부친 장완식과 모친 김숙자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전북부안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사업에도 관계하여 집을 오랫동안 비웠다. 모친은 적지 않은 머슴들을 데리고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벅찬 일이지만 양조장을 경영 했다. 이러한 가정 형편으로 장만영은 부친의 영향보다는 모친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양조장을 경영하여 집안 형편은 부유하였지만 장만영은 부친도 형제자매도 없이 쓸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모친은 유년시절의 그에게 ‘콩쥐’ 이야기니, ‘심청이’ 이야기 같은 것을 들려주었으며 할머니는 예수를 믿으셔서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장만영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외로운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무한하였으며 편모 아래에서의 성장환경은 장만영의 여성 편향성의 시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장만영은 백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몸으로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에 입학을 하였다. 객지에서 홀로 지내게 된 장만영은 학교가 파하면 도서관으로 가서 문학 서적을 저녁 늦게까지 읽으며 외로운 유년시절처럼 쓸쓸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소녀구락부』,『영려계』,『신여원』등의 여성 잡지를 접하면서 장만영은 이들 여성 잡지들이 자신의 생리에 맞는 것임을 깨닫게 되며 소녀처럼 애독하였다. 또한 장만영은 습작시절 해외 작품의 번역된 시집을 무턱대고 읽었다.
장만영은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배천에서 지내며 서면으로만 알아왔던 김억(金億)과 두터운 사제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또한 신석정·박영희(朴英熙)·최재서(崔載瑞)·오장환(吳章煥)·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서정주(徐廷柱)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1934년에는 일본 동경 미사키 영어학교(三崎英語學校) 고등과에 적을 두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36년 귀국하여 그해10월 신석정의 처제인 박 영규 여사와 결혼을 한다. 장만영은 1938년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혼자서 상경하여 관수동 22번지에서 순이와 함께 살았다. 장만영은 회고담에서 “순이가 여급질을 해다가 먹여주는 밥을 얻어 먹으며 (중략) 여급질은 할망정 순이는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순이는 바의 여급이었지만 장만영이 사랑한 여자였다. 이후 몇 번의 연애경험을 말하며 그가 사랑한 여인들에게 순이라는 애칭을 사용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장만영은 현실적 궁핍함과 창작력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가지 고향 배천에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배천의 온천을 경영하다가 1948년 서울에서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등 문우들의 시집을 발행해주기도 하였다. 이 때 많은 문인들이 온천을 찾았으며 장만영은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1950년 6·25 때에는 종군작가단에 편성된 문인들과 어울려 ≪전선문학 戰線文學≫을 간행하였다. 1954년에는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출판국장을 역임하면서 ≪신천지 新天地≫와 학생문예지 ≪신문예 新文藝≫를 주간하기도 하였다. 1959년에는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1966년에는 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에는 신시60년 기념사업회(新詩六十年紀念事業會)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7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1년 ≪동광 東光≫지 독자투고란에 습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같은 잡지 1932년 5월호에 시 〈봄노래〉가 김억(金億)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羊》 (1937년) 《축제》 (1939년) 《유년송(1948년)》 《밤의 서정》 (1956년) 《저녁 종소리 》(1957년) 《그리운 날에》 (1962년) 《장만영 시선집》 (1964년) 등을 발간했다. 위에 언급된 8권의 시집 외에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1958),수필집 《그리운 날에》(1965), 번역시집 《남구(南歐)의 시집》(1956)·《바이론시집》(1961)·《하이네시집》(1961) 등을 출간했고, 기타 저서로 《고등문예독본》(1952)·《현대시의 이해와 감상》(1957)·《소월시 감상》(1957)·《현대시감상》(1959) 등이 있다.
※ 들어가기 전에
장만영 시에 대한 논의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이후로 해서 장만영의 시를 연구한 논문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논문들은 기존의 장만영의 평가 다음의 글들은 장만영의 시를 모더니스트들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전원시’라는 관점에서 재단한 경우가 되겠다. “그가 생각한 시는 처음부터 전원, 또는 목가조의 세계에서 빚어지는 사람들의 가녀린 감정을 문맥화하는 것이었다.”(김용직(1996), 한국현대시사2, 한국문연), “그는 모더니즘에 속하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전원 티를 벗어나지 못했으며......”(조병춘(1980), 한국현대시사,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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