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야나기 무네요시의 복합의 미와 힌두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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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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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야나기 무네요시의 복합의 미와 힌두이즘
1. 서언
야나기 무네요시의 복합의 미는 평화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라는 틀 속에 너와 나를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전쟁을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으로 하지 않고 하나의 민족에 대한 통일로 전쟁을 정당화 하였다. 이에 반해 야나기는 이런 통일성을 말하기 보다는 각자에 대한 주체성, 독창성, 독립성 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복합의 미’이다. 이것은 또한 평화사상과도 연관되는데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그 민족, 종교 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시각의 사상은 오늘날 다원주의와도 연결되는데 특히 다원주의에는 문화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이 있는데 각각의 문화, 종교 등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나와 다른 문화에 대한 적개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궁극의 진리를 표방한다. 각각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진리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의 문화, 종교가 다르다고 부정하고 그 문화, 종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있어서 서양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동양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도교, 불교를 연결해 주는 종교가 힌두이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힌두이즘은 인도에서 나온 종교로 지역적으로도 힌두이즘은 서양의 철학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를 연결시켜 준다.
이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평화사상에 있어서의 ‘복합의 미’와 힌두이즘의 사상을 비교하여 서로 살펴보고자 한다. 얼핏 보면 힌두이즘과 야나기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야나기에 영향을 준 인물로 블레이크, 톨스토이가 있는가 하면 간디도 있었다. 간디 또한 톨스토이와 유사한 평화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신은 힌두이즘의 신봉자였다. 더욱이 평소에 『바가바드기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 책은 힌두이즘의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야나기가 직접적으로 힌두이즘을 공부했던, 그렇지 않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힌두이즘의 영향권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나기에 있어서 퀘이커 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도 받았는데 이 불교 또한 인도의 힌두이즘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여러 사상을 두루 섭렵했던 야나기와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말하는 힌두이즘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우선 야나기에 있어서의 전쟁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고, 힌두이즘의 사상과 야나기의 사상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제국주의의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통일성과 힌두이즘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다른 의미가 있다. 제국주의의 전쟁에 대한 통일성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같음만을 강조하지만 힌두이즘의 통일성은 우선 각자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통일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야나기의 복합의 미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힌두이즘의 사상 외에 인도에서 태생하여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한 불교의 사상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사실 야나기에 있어서의 ‘무저항주의’, ‘절대평화’ 사상 등은 야나기가 처음 말한 사상이 아니다. 여러 종교에서 그런 의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간디가 말하는 ‘비폭력적 저항’ 등이 이에 속한다. 이는 힌두이즘의 영향이기도 하거니와 인도의 자이나교의 영향이기도 하다. 실제로 자이나교의 ‘아힘사’는 간디의 사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살펴 볼 수는 없지만 야나기의 이런 사상도 간디, 톨스토이 등의 사상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야나기 무네요시의 전쟁에 대한 시각
야나기가 처음부터 전쟁을 반대하는 비전론자는 아니었다. 이렇게 비전론자로 바뀌는 계기는 톨스토이의 사상이 영향이다. 주전론자와 비전론자 사이에서 비전론자로 바뀌는 때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1905년이 지난 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후의 야나기의 글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1904년 러일전쟁을 두고 “천황의 위엄이 솟아오르는 아침해 처럼 대아시아의 주권을 장악하는 이 대일본의 전도(前途)여! …(중략)… 지금 어느 곳에서도 우리 국기가 펄럭이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자! …(중략)… 러일전쟁의 전도 또한 유쾌하지 않은가”라고 하여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1905년의 6월에 쓴 해전의 속보를 읽고에는 “쓰러진 사병들을 보고는 참담한 마음에 사로잡혔다”라고 쓰고 있으며, 1908년에는 거룩한 용사라는 글에서 “이제 톨스토이(1828-1910)와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 러시아의 소설가. 러시아 오룔주(州)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 출생. 주요저서 『첫사랑』(1860). 오룔주(州)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領地)에서 출생.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여섯 살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런 복잡한 가정사정이 한 소년의 비정상적인 첫사랑을 묘사한 중편(中篇) 『첫사랑』(1860)에 그 흔적이 엿보인다.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그라노프스키, 바쿠닌 등 진보적인 러시아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계속하여 소설을 발표하였고, 1850년 말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농노를 해방시켰다. 1852년 농노제의 비판으로 당국의 미움을 사,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구실로 체포된 후 고향에서 연금생활도 하였다.
의 가르침을 받으려”하고 있다. “칼을 잡은 사람만 용사”가 아니며 ‘최고의 승리’는 오히려 ‘지는 일’이라고 말하며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관점을 보이게 되었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보이지만 러일전쟁 전에는 단순한 국가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사상을 답습했다면 러일전쟁 후 그 참담한 현실을 보고 전쟁의 폐해를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1889년 3월 도쿄 출생인 야나기는 1904년 11월 도쿠토미 겐지로의 『톨스토이』를 읽어 그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야나기 외의 시라카바파도 전쟁에 대해 주전론자들도 톨스토이 등의 영향으로 비전론자로 생각을 바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무샤노코지이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톨스토이 사상의 영향으로 비전론자가 되었는데 1905년 11월에는 세상으로 개량하기 위해서 수백만 군대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고 논하고 있다. 1906년 4월 21일 일기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지진 사망자보다 러일전쟁의 사망자가 훨씬 많다고 한탄하였고, 그해 5월 31일의 일기에서도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주전론을 제창하는 자”라고 쓰여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러일전쟁의 전후로 주전론자에서 비전론자로 전향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시라카바파는 톨스토이 외에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 일본 메이지 · 다이쇼시대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 종교가. 무교회주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를 배출하여 현대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교신 · 함석헌을 통하여 한국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도 역시 비전론을 말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본지식인층은 톨스토이, 우치무라 간조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또한 우리나라의 재야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함석헌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야나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야나기의 평화사상과 비교하여 힌두이즘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힌두이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간디 간디(1869-1948) :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유명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대해 반영 · 비협력 운동 등의 비폭력 저항을 전개하였다.
이다. 톨스토이와 간디는 서로 서신을 주고받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나이로는 간디가 1869년생이고 톨스토이가 1828년생이므로 아무래도 간디가 톨스토이에게 보다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