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의 영성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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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함석헌 선생의 영성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함석헌 선생의 영성을 통해 본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1. 선택 이유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행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당 행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삶의 지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믿음으로 갖고 있는 자는 죄, 의,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발적인 순종과 사랑의 모습이 흘러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조차도 너무 이상적이고 개념적인 말장난에 그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한국 근대사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았던 함석헌 선생의 삶과 그 분의 영성을 살펴보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자 한다.
2. 함석헌의 생애(1901~1989)
함석헌 선생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이라는 지역이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평안도 지역은 유교와 양반들의 영향이 한양보다는 덜 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의 이방 갈릴리 지역”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과 충청도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던 이들이 서북지역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 있었기에 사회 구조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깊었고, 개신교의 자발적인 수용에 앞장선 것이란 생각을 한다. 평안도 지역은 개신교 인구가 상당히 많은 지역이었는데, 특히 평양의 경우 1938년 한반도 전체 개신교인의 75%가 모였으며 1945년 즈음에는 약 80%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성수, 『함석헌평전』(서울: 도서출판 삼인, 2001), 33쪽.
함석헌 선생은 장로교회의 배경에서 성장을 하였고 숙부 함일형이 세운 신식 기독교 학교에 입학을 한다. 함일형의 장남 함석규는 배재학당 출신으로 그 마을의 첫 장로교 목사가 되어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등 함석헌 선생의 집안 역시 기독교적 가풍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세의 나이에 3.1운동을 경험하면서 사회 운동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일본에서 만난 우치무라 간조와의 성경공부를 통해 그는 무교회신자가 된다. 그리고 수차례 감방 생활을 하면서 노장 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력을 느끼고 다양한 종교적 색채를 수용하게 된다.
이후 1950~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시대의 지성인으로 『사상계』, 『씨알의소리』를 발간하며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였고, 「대선언」,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등 다수의 저술 등을 남기며 김동길, 김경재, 김대중 등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삶을 살았다.
3. 함석헌 선생의 영성(교과서의 기준을 중심으로)
- 명상과 기도에 관하여 - 함석헌 선생이 퀘이커 교도였다는 사실은 이번 과제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무교회신자로 알려진 그가 퀘이커 교도일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갈만한 일이었다. “퀘어커리즘은 내가 생각하는 새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미래의 새 종교는 퀘이커리즘과 비슷한 형태의 종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의 씨앗이 퀘이커리즘 안에 있습니다.” Ham, Sokhon, Kicked by God, 19쪽, 김성수, 위의 책, 127쪽, 재인용.
함석헌 선생이 생각하는 묵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처음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고 무교회신자였으나 훗날 무교회주의의 신앙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무관심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여타 다른 이유들로 인해 우치무라의 신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다. 김성수, 위의 책, 70-76.
그리고 무교회주의와 비슷하지만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는 퀘이커리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된다. 특히, 무교회주의의 영성에서 공동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실망감과 달리 퀘이커들의 단체 명상에서 그는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Ham, Sokhon, "The Voice of Ham Sokhon." Friends Journal, 김성수, 위의 책, 127,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