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과학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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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의 과학 그리고 우리
“어떤 가정 위에서 일정한 인식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세워진 광범위한 체계적 지식을 가리키는 동시에 자연연구의 방법” 이것이 자연과학의 사전적 정의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과학의 시대이다. 내 주머니에는 언제나 원하는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는 핸드폰이 있으며, 누구나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인터넷이 개방되어있다. 전래동화 속 토끼가 살고 있다고 하던 달은 이미 40년 전 인간의 발이 닿았고 저 멀리 화성에는 이미 인간이 제작한 탐사선이 도착해 있다. 아니 지금 바로 나 조차도 이 보고서를 노트북 컴퓨터로 작성하여 교수님의 메일로 보내 교수님이 원하는 장소에서 언제나 읽을 수 있다는, 200년 전 아니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인간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현재 객관적인 과학의 힘이다.
과학의 사전적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은 인간을 무한히 발전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럽의 물리학자와 데카르트와 같은 천재적은 수학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의 사상과 사고 체계를 배우며 자라왔다. 물론 나의 대학강의는 이들의 논리학에 기반한 일반논리학, 미분적분학, 물리학, 화학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들의 사상과 자연을 기술하는 방법은 경이적이며 어릴 적부터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09학번 물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09학번으로써의 두 번째 학기에 나는 ‘유학과 직업윤리’ 라는 수업을 사실 학교의 커리큘럼에 의해 듣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알고 있던 유학과 동양의 사상이란 것은 어릴 적 할아버지 들이 말씀하시던 공자왈 맹자왈 같은 현대에 맞지 않는 딱딱한 학문 이였으며, 우리나라를 조선시대 말 서양의 힘에 밀리게 만들었던 구시대적인 학문이였다. 성균관대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연세대학교에서 기독교에 관한 수업이 있듯, 우리도 전통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만이 내 목표였다. 그러나 첫 시간 나는 이 수업에 무언가 뒤통수를 맞는 느낌과 동시에 신비감이 들었다.
“유학과 직업윤리라는 수업은 잘 못 만들어진 수업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첫 시간 이러한 파격적인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기억난다.
교수님은 ‘유학은 죽은 학문’ 이라 말씀하셨고, 유학 그리고 직업윤리라는 것이 왜 수업화 되면 아니 되는지 말씀해 주셨다. (물론 유학이 가치가 없는 학문이라고는 절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의 수업은 ’동양철학의 윤리관과 자연학에 대한 이해’ 를 목표로 하는 수업이 되었다. 처음에는 다소 황당하였지만, 평소 관심 없던 동양철학이라는 분야와 평생 관심 있던 자연과학의 연관성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계속 수업을 듣게 되었다.
혼천의, 측우기,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 등과 같은 과학적 발명품이 서양보다 빠르게 우리나라에서 발명되었다. 세계 3대발명품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듯이 중세초기의 과학기술은 서양이 아닌 동양이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동양, 아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유럽의 그것보다 느리게 만든 것 일까? 조선시대의 자연과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수업을 들어가며 점차 배워가는 고대와 중세시절의 동서양의 사상적, 윤리적 차이와 평소 궁금해하던 과학사를 정리하여 나는 해답을 찾고자 한다.
“조선시대 전기 15세기 전반 동안 궁정에서는 세종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많은 천문역산 연구와 함께 수많은 기구들이 제작되고 밤마다 하늘을 관측했다. 이 시기의 천문기상학 연구는 ‘간의’를 비롯한 천문기구의 제작과 사용, 측우기와 수표 등, 그리고 1442년에 완성된 칠정산등으로 대표된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달상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 의방유취 · 팔도지리지 · 총통등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기술에 관한 책이지만, 농업기술과 의약 지식, 박물학, 생물학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화기제조에 관한 기술은 여러 화학 분야의 지식을 전제한 것이며, 세종 때 발달한 인쇄기술 또한 화학 지식과 함께 물리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발달된 과학 분야 가운데 의학의 경우는 뒷날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으로 정리되었다.”
조선전기의 과학발달상을 보면 확실히 농업위주의 과학발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농업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발달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세종 때인 조선전기에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과연 단순한 시대의 흐름 것인가? 아니면 조선만의 과학적 학문체계의 발전 때문 이였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특별한 ‘의외성’ 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 뉴턴, 아인슈타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불세출의 천재들이며 학문의 패러다임을 바꾼 이들이다. 이들의 시대 이전과 이후의 인류의 사고체계는 바뀌었다. 세상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적 분위기도 흐름중의 하나이고 학문의 발전도 큰 흐름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대물리의 양자역학에서 증명된 ‘내 몸이 벽돌로 된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확률’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우리에겐 꼭 일어난다. 조선의 ‘의외성’ 그 것, 그 사람이 바로 장영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