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야나기 무네요시 의 다도론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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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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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야나기 무네요시”의 다도론에 대한 고찰
Ⅰ.서론
Ⅱ.본론
1.다도를 생각한다.
2.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를 보다
3.대명물을 보고
4.차의 병폐
5.다인의 자격
Ⅲ.결론
Ⅰ.서론
일본에서의 차는 단순히 음료의 역할만으로 그치지 않고 차로써 藝를 행할 수 있으며 또한 禮를 갖출 수 도 있고 더 나아가 道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러한 도의 경지에 이른 일본의 차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차(茶)란 차나무의 잎을 뜻하며 순수 우리말로 ‘차’ 혹은 ‘다’라고 부른다.
일본의 차의 원류인 차 마시기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대략 B.C 2700년 경 신농 시대부터 마셨다고 육우가 지은 『다경』에 실려 있으나 차나무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경에 있었고 그때부터 차를 마셨을 것으로 짐작한다. 차가 독초에 중독된 증상을 제거한 것에서부터 인간에게 널리 차를 마시게 한데부터 그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 『사기』에 B.C 1600경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적혀있으며 춘추전국시대에 차가 사대부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시장에서 매매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서 비로소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김영, 『일본 문화의 이해』, 제이엔씨, 2006년. 159-160p 참조.
이런 차의 문화가 일본의 헤이안시대(794-1192)초기에 들어왔으나 일본에 정착되지 못하고 대부분 소멸된 후 400년 후 가마쿠라 시대(1192-1333)초기에 송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로 인해 일본에 다시 차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선승 에사이(榮西) 에사이 (榮西,1142-1215)선사는 송나라 천태산에서 임제종을 배우고 일본으로 돌아와 『끽다양생기』를 지었고, 에이사이선사가 가지고 온 차씨는 고산사(高山寺) 묘에(明惠)선사에 의해 교토로부터 우지(宇治)지방까지 차밭이 재배되었다는 설이 있다.
와 도겐(道元) 도겐선사는 曹洞宗의 시조로 중국에서 다도구 차이레와 도자기의 도공들을 데리고 귀국하였고, 송나라의 『선원청규』를 본 따 『영평청규』를 지어서 수도생활 가운데 끽다, 점다, 대좌다탕 등의 다례를 제정하였다.
은 중국의 차와 선을 일본에 전하였다. 간결하고 깊이가 있는 선사상 禪의 특징으로 첫 번째 특징은 불립문자이다. 선은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담정숙, 즉 시들고 담담하며 고요하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무일물이다.
은 교토 료안지의 석정(石庭) 료안지의 석정은 오로지 돌과 자갈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원
이나 일본 산수화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셋슈 셋슈(1420-1506) 일본 화가 - 셋슈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의 작품이 뛰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학문에 조예가 깊은 고명한 선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교 선종에서 영감을 얻은 수묵화의 전통은 그의 예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4세기에 중국에서 도입된 화풍을 일본의 독특한 특징을 나타내는 화풍으로 탈바꿈시켰다. 셋슈는 생전에 이미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되었다. 대부분의 후세 예술가들은 19세기까지도 그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음으로써 당대의 평가를 증명했다. 몇몇 화가들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했는데, 자기 작품에 제5대 셋슈라고 자랑스럽게 서명한 16세기의 거장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도 그런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순수한 일본화파인 운코쿠파는 그의 예술적 유산을 성실히 계승하는 데 헌신했다.
의 수묵, 일본다도의 와비차 와비차-중세말 센노 리큐는 간소하고 차분한 일본의 미의식인 와비(び)의 개념을 구현하고 정립하였다. 그의 와비(び)를 구현하기 위해 다도는 작은 족자 하나와 꽃 한 송이 꽂힌 꽃병 이외엔 아무 장식이 없는 작고 수수한 다다미 2장짜리 다실과 또한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다기들을 가지고 행하는 문화적 행위였다. 리큐는 이러한 미의식 추구를 바탕으로 차 달이기의 의례적인 측면, 다회의 진행순서, 회석요리 등을 양식화하여 다도를 확립한다.
7)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1423-1502)는 서원화에 반대되는 인간의 마음을 존중하는 새로운 茶風을 이르켰다. 다도에서 차도구의 완벽함은 오히려 본래의 미의식을 거스린다 하여 불완전의 미의식 사상을 태동시켰다. 주코는 화려한 서원의 차를 소박하게 변용하여 와비의 초암차를 형성하였다. 다다미 4첩 반의 차실을 만들고, 대나무로 기둥을 삼고 상아의 차샤코와 꽃병을 대나무로 바꾸기도 하였으며 당시 서원에서는 도코노마(床間)의 벽면에 수묵화를 그려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주코는 그림 대신 벽지를 서원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등과 같은 독창적인 일본 고유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