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타자이 오사무와 인간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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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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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와
인간실격(人間失格)
목 차
Ⅰ. 다자이 오사무(太幸治)
ⅰ. 생애
ⅱ. 문학적 배경
ⅲ. 평가
ⅳ. 자살
Ⅱ. 소설「인간실격」
ⅰ. 줄거리
ⅱ. 등장인물
Ⅲ. 작품 읽기의 키워드
ⅰ. 불안과 공포 - 인간(인간관계)에 대한 공포
ⅱ. 익살 (광대짓) -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은폐할 수 있는 도구.
ⅲ. 아버지 -무서움의 대상
ⅳ. 여성상
ⅴ. 인간실격의 의의
Ⅳ. 다른 작품과의 비교
ⅰ. 이상 「날개」
ⅱ.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Ⅴ. 느낌
Ⅵ. 참고문헌
[다자이 오사무(太幸治)의 저서]
다자이 오사무의 귀향 (1993, 도서출판 진화)
만년 (1997, 소화)
달려라 메로스 (2003, 숲)
사양 인간실격 (2004, 을유문화사)
뷔용의 아내 (2004, 홍)
산화 (2004, 책이있는마을)
여자의 결투 (2005, 하늘연못)
옛이야기 (2005, 소화)
일본단편소설 BEST 15 (2005, 거송미디어)
프로메테우스의 생 간을 쪼는 것은 독수리이지만,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쪼고 있다.
『회상 다자이 오사무』中 , 쓰시마 미치코(津島美知子)
Ⅰ. 다자이 오사무 (太幸治, Dazai Osamu, 1909-1948)
ⅰ. 생애
다자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아오모리 현(靑森縣) 기타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아버지는 그 지방의 대지주이며 귀족원(중의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7남 4녀 중의 10번째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 및 동생이 요절하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8남매 중의 막내로,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특히, 아버지가 귀족원 의원이 되어 도쿄에 머물게 되자 어머니도 도쿄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진 관계로, 다자이는 국민학교 2, 3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지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형제들 중에서 유달리 다자이에게만 냉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다자이는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열등 의식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도 모른채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소년 시절의 다자이는,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소문난 익살꾼이었으나, 고등학교 시절 동인 잡지에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위선을 폭로한 「무한 나락」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3학년 때인 1929년, 다량의 수면제를 먹은 것이 그의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이었다. 자살 동기는 다자이 본인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기에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2년 전에 있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설도 있고, 단순히 상용하던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일시적인 혼수 상태에 빠졌을 뿐이라는 설도 있다.
1930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이후로 사제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자이 문학의 성격은 이부세 문학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문학적인 면에서 다자이가 이부세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단지 다자이가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부세가 보살펴 준 덕분에 다자이의 문학 세계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다.
같은 해,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도쿄로 찾아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게 되나, 그 때문에 다자이는 고향의 가족들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하였다. 당시는 결혼을 하더라도 분가 제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다자이는 이 처분으로 인하여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분가 제적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의 다자이가 비합법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구도 에이조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좌익 운동에 가담하였다. 당시의 작품인 『지주 일대』와 『학생군』은 착취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구도가 검거된 이듬해에 다자이는 자수하였고, 이후로 비합법 운동에서 탈락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 집으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긴자(銀座) 카페의 호스테스와 함께 가나가와 현 에노 섬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여자는 죽고 다자이는 살아남아 가마쿠라(鎌倉)의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자살에 관하여는 「도쿄 팔경」「인간실격」「광언의 신」「허구의 봄」「광대의 꽃」등에서 다자이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다자이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때의 체험 역시 평생 동안 죄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퇴원 이후의 다자이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패배자로서 데카당 생활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할 가망이 없게 되자 미야코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응하여 그것마저 실패하고는, 1935년 가마쿠라의 산중에서 혼자 자살을 기도하여 미수에 그쳤다. 그때 유서 대신으로 썼던 「만년」이 뜻하지 않게 문단의 각광을 받아 작가로서의 길이 열렸음에도, 다시금 마약 중독, 갈망하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지 못한 좌절감 등으로 실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1936년 다자이가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쓰요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두 사람은 미나카미(水上) 온천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하지만, 이 자살도 미수로 끝나고, 마침내 하쓰요와 결별한 다자이는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1939년 미치코(石原美知子) 부인과의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다자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며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가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부악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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