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이단의 규정과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단화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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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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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단의 규정과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단화에 관한 연구
1.들어가면서:§ 이단에 대한 논쟁§
‘이단이란 일반적으로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를 추종함에 있어서 유형을 같이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될 만한 이념적 차이가 발생할 경우 보수주의 측의 반대 입장에 서는 자들을 일컬어 지칭하는 명사이다. 한국 사람들의 언어에 있어서 이단이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는 자기가 신봉하는 도와 다른 길을 걷는 것, 또는 전통적인 것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1세기 무렵 유대교에서 볼때 기독교는 정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 였으며, 현재 카톨릭과 함께 기독교의 양대 산맥으로 존재하는 개신교의 경우도 초기의 역사에선 이단으로 몰려, 수많은 신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이들에 대한 박해는 몇 번의 종교 전쟁과 개신교와 카톨릭 간의 힘의 역학 관계가 평행을 이루었을 때에야 끝나게 된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진정한 교단은 하나가 아닌 양립하는 관계가 되어 갔으며, 성경에 대한 재해석과, 성경의 대중 보급화로 인하여 그 이후 더욱더 많은 종파들이 나타나게 되며 이러한 종파들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20세기부터 시작된 에큐매니칼 교파나 교단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의 일치 결속을 도모하는 세계교회 일치운동
운동에 편승하여 이단에서 당당한 하나의 종파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경우에도 이러한 광범위한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여 이단으로 취급 받는 종파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성경에 대한 다른 해석과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들(스스로를 예수님의 재림이라 주장하거나, 법적으로 제제 받을 수 있는 행위를 행하거나)을 함으로써 사회적 낙인으로 인하여 이단으로 낙인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리는 부분은 아직도 기독교 내부에서 논쟁이 분분한 내용이거나 혹은 완전히 틀린 내용이지만 암묵적 합의(안식일과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에 의해서 행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로써는 단순히 이단으로 판명 짓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이단에 대한 박해의 경우에는 종교적 교리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정치적 역학 관계에 의해서 핍박을 겪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그 정체성을 섣불리 규정 짓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우리는 한 종교의 연구를 통하여 오늘날에 존재하는 이단에 대한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에 대한 논란에서 이단으로 규명 된 단체(혹은 개인)가 역사적으로 항상 이단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르게는 기독교 초기의 역사부터 최근의 이단 논쟁까지. 가톨릭 교회(Rome Catholic Church)의 이단관이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 내에 있으며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하려는 교의"를 이단이라고 간주한다였던 것처럼 이단에 대한 논쟁은 결국은 기독교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유지하여 교회 내의 단일한 세력, 그리고 정통 세력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가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말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혼란의 여지를 줄이자라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새로운 사상 및 새로운 해석을 원천적으로 봉쇄, 혹은 기존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을 엄금하려 했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종교와 정치가 일치되던 중세 시대엔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에 관계 없이 결국 사회에 대한 부적응자로 낙인 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때문에 종교에 대한 투쟁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시대에 시작 된 종교개혁은 시대 변화의 조류를 타고 종교의 사상에 대한 자유화를 성취해 내었으며, 그 후 종교와 사회는 분리 되었다고 볼 수 있었으며, 때문에 그 후의 이단에 대한 논쟁은 사회와 종교에서 일정 부분 개별화 되어 사고되고 있다.
2.한국사회에서 여호와 증인의 역사
여호와의 증인은 한국에서 발생된 신흥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유입된 그리스도계 신흥종교 가운데 가장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종종 큰 논란과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 한국사회에 전래된 것은 1912년 홀리스터 선교사 부부가 내한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14년에는 한국 성경연구원이란 이름으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한글로 번역인쇄 되었고, 1923년에는 인쇄공장도 설립되어 수많은 인쇄물들을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정치권력을 사탄의 권력으로 규정하는 교리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서 출판된 간행물들은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소각되고 말았다. 또한 세계 제 2차대전시에는 궁성요배와 신사참배의 거부로 인해 전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그 중에는 옥중에서 사망하는 자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