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

 1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1
 2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2
 3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3
 4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4
 5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5
 6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6
 7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7
 8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8
 9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9
 10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과학 일제시대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병도
1. 인물조사
이병도(李丙燾 1896∼1989)
1927 조선사편수회로 국사 연구 시작
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
1945∼62 서울대 문리대 교수
1955∼82 국사편찬위원
1960 문교부 장관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 민족상 수상
●인생항로를 바꿔놓은 일인학자의 교육
이병도는 1896년 8월 14일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사학의 길로 진로를 정한 그는 일본 와세대 대학에 입학한다. 이병도가 학사 1학년 때부터 가르침을 받은 요시다 박사는 일본 사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석학이었으며 일본사 외에도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영향력이 있는 학자로서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영향력이 컸으며 그만큼 교분도 넓었다. 그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이병도를 비롯하여 문학부에 적을 둔 한국 유학생들은 어느 날 그의 초대를 받고 간 자리에서 소위 한일합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그동안 궁금했던 사안을 놓고 대화를 하게 된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 박사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한국 유학생들의 질문에 요시다 박사는 소위 일선동화론(日鮮同化論)으로 자신있게 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학생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병도 스스로 해방 이후 6,70년대 잡지글에서까지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꼽고 있는 일인 식민사학자 요시다 박사는 일본이 소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는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요시다 이후 취임한 쓰다(津田左右吉) 박사 밑에서 강의를 받으면서 국사 연구의 뜻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자신의 뜻을 살릴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그 후 그는 신문, 잡지 등의 각종 간행물에 원고를 발표하였지만, 본격적인 국사 연구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31세가 되던 해에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병도는, 그가 존경하는 일본 사학자들의 지도와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본격적인 국사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이병도의 연구활동
조선사편수회에서 국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병도는 활발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기 전 한국의 근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쟁사(黨爭史)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나, 조선사편수회 연구 활동 과정에서 연구 방향을 유학사(儒學史)로 전환하였다. 그 이유는 당쟁사보다 유학사가 더 근본적인 요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학사 연구는 무엇보다도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유학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 논문 주제로 이율곡의 입산동기를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논문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행된 {조선사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창립되었던 1920년대 후반기의 역사 연구의 학풍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박은식, 신채호(申采浩) 등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사학, 문헌고정비평과 역사적 사실의 고증적 인식을 주로 하는 실증사학 및 사회경제사학으로 불리는 유물사관으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학풍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실증사학계로 분류된다. 실증사학은 당시 일본 사학계의 일반적 조류인 랑케(Leopold von Ranke)의 사학을 밑바탕으로 하여 개별적인 역사 사실의 문헌 고증을 주로 한 계열이다. 이들은 랑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했다. 이들은 주로 일제의 고등교육을 통하여 신학문에 접했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일본인 조선학 연구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병도는 얼마 후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병도 자신이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의 연구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본인 선생들은 "그들의 정치적 요구와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한국과 만주에 걸친 역사 지리에 관한 조사 사업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던 것이다. 당시 이병도가 고대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스승인 이케우치(池內) 박사가 그 방면의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병도에게 만주 지리 역사 연구 보고를 꾸준히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이 보내 주는 그 자료에 대해 "필시 고대사 연구에는 역사 지리의 연구가 기초적이고 선결 요건"임을 스스로 간파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분분한 삼한사군(三韓四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병도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일본 학자들의 의도와 방향에 성실하게 따랐으며 그들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이병도 자신의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일인 학자들의 관심과 배려에 대해 깊은 감사와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데서 유래된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일본의 만선사관 창출과 관련하여 일제 관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일인 사학자들의 바램대로 사군 문제를 연구하게 되고, 그 연구 성과는 진번군고라는 논문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1927년 그는 이케우치 박사를 통해 동경제대 중심의 { 잡지}에 [진번군고]를 비롯하여 [고려삼소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에 발표된 이 논문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사학 대회에서 와세대 대학의 시미즈(淸水泰次) 박사의 권유로 공식 발표하기까지 하였는데,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일본 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다고 회상하는 이병도는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병도는 해방 이후 자신의 연구 활동을 뒤돌아보면서 "일제의 탄압 밑에 민족의 역사가 짓밟혀 가는 수난 속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밝혀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리화한다. 이병도의 소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식민사관 정립을 위해 설립했던 조선사편수회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공헌하고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관적 의지일 뿐만 아니라 환상이며 감상적인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 학풍의 잔존과 국사학계 대부 이병도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게는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민족사의 구축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일제 침략하에서 침윤되었던 식민사학의 모든 악폐-예컨대 정체성론, 타율성사관, 지리적 결정론,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를 일소하고 전통 문화와 민족 발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인식시켜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에 가졌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학풍이 바로 그것이다. 1930년대에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국사 연구를 했던 민족주의 사학의 안재홍과 정인보는 다른 많은 독립투사와 같이 학계를 거의 떠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던 실증사학풍의 학자들, 즉 이병도를 주축으로 한 사학자들은 학계에 그대로 남았다. 더욱이 한국전쟁 전에 이미 많은 유물사관론자들이 연구의 장을 달리한데다가, 한국전쟁 때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납북되었기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 연구 학풍이 구축되고 실증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거의 10여 년간의 남한의 국사학계는 주체 부재, 민족 상실의 침체기를 맞았고, 특히 동서 냉전 체제의 강화로 민족주의의 금기와 구미문화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심화되면서 민족주의적 국사 연구는 상실되고, 일제가 남겨놓은 식민사관을 뿌리로 하는 국사 연구가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실증학풍은 그 형성 시기인 1930∼40년대 일제의 탄압 강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민족 운동의 예봉마저 꺾인 상태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식민사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증사학이 개별적 사실의 고증에 치우쳐 있었으며 개별적 사실의 고증이 전체 사회에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으로 연결되는지, 일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지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1970년대 후반에야 일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주요학자인 이병도, 신석호 등은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사편수회에서 다년간의 수학 한 후 국사편찬위원회 핵심으로 들어앉았다. 특히 조선사편수회 등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해 지도되고 성장한 이병도의 경우 국사학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그로 인해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가 창립되었을 때 진단학회 회원들이 서울대 교수로 대거 진출함으로써 국사학계의 주요 인맥을 형성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는 진단학회 주요 멤버였고 와세다 대학 출신인 이병도와 경성제대 출신의 이인영(李仁榮)에 의해서 재건, 창설되었다. 동국대학 사학과는 불교학과·국문학과와 더불어 가장 먼저 설립되었는데 이병도는 초기부터 국사 강의를 맡았다. 한편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계속 이끌면서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1955년에는 우리 나라 정치기구의 역사적 고찰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 일부분이 서울대학 논문집에 발표된 남당고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