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회의 이해 -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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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회의 이해 -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사회의 이해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한반도와는 다른 자연문화 유산에다 독특한 인문지리적 환경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수난과 고통스런 역사를 많이 겪은 섬이다. 제주는 해양과 대륙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생명력을 이어왔다. 고대에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교역로상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면, 근세에는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으로서 제주는 늘 위험에 처해있는 섬이었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제주섬에 주둔하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2월이다. 이 시기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예상되던 시점이다. 상황이 다급해진 일본은 미군과의 본토결전에 대비해 7개방면의 육,해군 결전작전을 준비한다.
1945년이 되면 한반도 최남단의 한 섬인 제주도는 일본의 보토사수 작전의 가장 핵심지역이 된다. 일본군의 유일한 목표는 일본 천황제의 유지와 일본본토사수다. 그를 위해 제주는 전쟁터가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2월까지 제주의 일본군 병력은 3천명 정도 주둔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약 3백명에서 그 해 7월에는 약 1천명에 머물렀으나 1945년 들어서면서 3배 늘어난 것이다. 이 시기의 전쟁상황은 일본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944년 중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일본 대본영에서는 이미 위기의식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모슬포에는 레이더기지가 설치되고 중국대륙과 일본본토폭격에 대비하는 등 제주섬의 상황 역시 긴박하게 전개된다. 일본군 병력은 1945년 3월 약 2만명에서 6월에는 약 6만 5천명으로, 8월 해방 직전에는 3개 사단 및 1개 여단 약 7만5천명으로 급속히 증강한다. 당시 제주섬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완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주도 내에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시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육.해군의 비행장, 포대, 참호, 고사포 진지, 육.해군의 훈련장 및 감시초소, 대피소, 지하 참호, 특공대 기지,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매립지 등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송악산 일대의 지하 참호는 연면적 5만7000㎡에 달하는데, 이는 일본 내에서 가장 큰 군사시설로 알려진 가나가와현 소재 해군 제1항공시설 공장(3만4800㎡)과 일왕 및 정부기관을 피신시키려 했던 나가노현 마쓰시로 대본영의 지하시설(3만2000㎡)보다 규모가 크다. 즉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 이른바 본토 결전을 위해 파놓은 최대 규모의 지하참호가 일본 본토 바깥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지하참호에는 어뢰고, 연료고, 통신고, 고사포 지휘소 등의 군사시설이 들어있었다. 이 같은 지하시설의 건설과 함께 많은 병력이 1944년부터 제주도에 집중되었다. 일제 말기 오키나와 전투를 상회하는 8만4000명의 육군 병력이 집중될 예정이었고, 실제 제주도에는 광복 직전 7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주도에 산재해 있는 일본군 전쟁유적이 얼마나 되며 그 구체적 실태가 어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제주도 내 주둔 일본군의 실태, 군사시설의 구축 과정, 제주 주둔 일본군과 강제 동원된 제주 도민과의 관계,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 제주도에서의 일본군 본토 결전 준비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일본은 1926년부터 제주를 본격적으로 군사 기지화시켰고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제주를 가미가제의 발진기지로 만들었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출격한 일본군은 중국의 난징을 연 600기의 항공기로 36회나 공습했으며 이때 투하된 폭탄만 300톤이 넘었다. 일본군은 중국 공습 이후에 제주도를 미군 항공기와의 공중전을 위한 기지로 적극 활용했다. 이런 항공기 중심 기지였던 제주도를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최후의 요새로 만든 것은 44년 일본 해군이 전멸되고 45년 오키나와가 미군에 점령됐던 시점이다. ‘결1호’부터 ‘결7호’까지 수립된 일본군 최후의 본토 사수 작전 중에서 ‘결7호’는 조선방면에서 일본 본토로 넘어오는 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 거점 지역으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1945년 4월8일 사령관 나가츠사비주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일본육군 58군이 제주도로 편성되어 진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군은 제주 지역을 군사 요새화시켜놓기 위해 1945년 1월 1천 명이었던 일본군 병력을 7만 5천 명까지 증강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었다. 일본육군 58군은 초기에는 후방에 은폐해 있다가 상륙 후 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 주저항진지와 후방 복곽진지를 잇는 하치마끼 병참도로를 개설했으나 나중에는 철저하게 해안가부터 막는 해안가 봉쇄작전으로 바뀌었다. 이때 일본군이 만든 진지동굴 중 가장 큰 규모는 북제주군 한경면 청수리의 가마오름에 있는 진지동굴로 총 길이가 2,000m가 넘고 출입구만 33곳이 넘는 총 3층 구조 미로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특히 이 가마오름 진지 동굴은 일본군 58군 111사단이 주둔했던 군사적 요충지로 견고함과 군사학적으로 뛰어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제주의 수많은 동굴진지들을 누가 건설했느냐는 점이다. 일본군은 당시 제주도민을 무차별적으로 차출하여 비좁은 갱도를 파서 산 전체를 방어할 수 있도록 혹독한 노역을 시켰다. 비록 미군에 항복함으로써 최후의 결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일본이 끝까지 전쟁을 벌였다면 아마 제주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형과 소수의 제주도민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제주시내 동쪽에 위치한 사라봉에는 동굴들이 많은데 1960년대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해친다는 등의 동굴 관련 괴담이 퍼져 있었다. 그것은 동굴에 대한 의구심에 가까워, 지난 2002년 근대문화유산 조사 때까지 근 30년 동안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 조사를 하면서 동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자연동굴이 아니라 일제의 의해 파헤쳐진 동굴진지라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제주도에는 이러한 전쟁시설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본군 군사유적은 2000년대에 들어 수차례의 학술조사에 의해 비로소 체계적으로 그 전모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술논문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청구학술논문집 제22집’에 발표한 츠카자키 마사유키의 논문이 제주 4.3연구소에서 발간한 ‘4.3과 역사 제4호’에 번역본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자료로서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부분만 봐도 제주 전역에 있는 일본군 진지동굴은 군사 및 역사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유적인 동시에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아픈 역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일본군 진지동굴이나 유물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는 수많은 박물관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런 유물을 제대로 지키는 박물관은 ‘제주 전쟁역사평화 박물관’이 유일하다. 가마오름 평화박물관은 겨우 한두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통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10평 내외의 방과 회의실, 숙소, 의무실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가마오름 자체가 전체 요새로 되어 있을 정도로 촘촘하게, 마치 우리가 월남전 영화에서 흔히 봤던 베트공 진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박물관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강제 징용당해 진지동굴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표현한 마네킹과 전시 장면들이 조금은 어색하고 약간은 조잡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래서 관람을 하다가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박물관이 약간 부실한 것은 이 박물관은 국립이나 도립이 아닌 순수한 개인박물관이기 때문이다. 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은 가마오름 진지동굴에 강제징용을 당한 부친의 생생한 증언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서 평화박물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관장은 관광버스 기사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가마오름의 땅을 조금씩 사기 시작했으며 갖은 고생과 노력 끝에 2002년 부지를 확보해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초창기부터 돈이 없이 시작한 탓에 공사는 겨우 2004년 3월에야 1차 완공을 했으며 자금난으로 이영근 관장이 혼자서 진지땅굴을 복원시키고 유물을 모아 박물관 내부를 꾸몄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에서 지원해주지 않아 혼자만의 갖은 노력으로 유지하던 박물관이 일본에 매각될 위기에 처해 있다. 평화박물관은 개관과 운영, 시설 확장 등에 막대한 사업비가 들어 개관 초기부터 자금 압박이 심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모 단체에서 계속 매입 의사를 밝히며 매각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영근 관장은 자금 때문에 수십억 원의 빚이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한국 측 기업이나 한국인이 박물관을 매입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영근 관장은 ‘일본 측이 박물관을 사들이고 나서 군국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는데 이용할까 우려가 많다’라고 밝혔는데, 실제로 일본에서 자신들의 치부가 있는 일본군 동굴기지를 사들여 자신들의 역사적 잣대로 바꿀 가능성은 매우 높다. 즉, 태평양 전쟁의 정당성이나 그 당시 일본군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전역은 일본에 의한 수탈과 억압을 받았다. 그중에서 제주는 일본으로 끌려간 강제징용자가 많았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일본이 최후까지 전쟁을 통해 군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실상을 알 수 있는 가마오름 동굴진지는 참으로 귀중한 자료이지만, 국가에서는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영근 관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일본에 매각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심정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제주도에 아픔이 곳곳에 눈에 보인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아픔을 외면이 아닌 무관심 속에 방치해 두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전쟁유물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배우는 것은 아니어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라에서 조차도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늦기전에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