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한기형 개벽의 종교적 이상주의와 근대문학의 사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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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한기형 개벽의 종교적 이상주의와 근대문학의 사상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기형, 『『개벽』의 종교적 이상주의와 근대문학의 사상화』
1. 천도교의 미디어 정책: 인민성, 근대성, 사회적 헤게모니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근대적종교로서의 존립여부를 결정짓는 자신의 정체성과 종교정책을 재설정하게 된다. 식민지 근대호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종교적, 사회적 비전을 수립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1919년 9월에 이돈화, 정도전, 박래홍, 박달성, 이두성, 김옥빈, 방정환 등을 중심으로 창립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는 실질적인 천도교 개혁의 추진체로, 교리의 연구 선전과 동시에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자 하고자 하였다. 다소 거리가 있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자 했다는 것은 천도교 신학의 발전과 근대의 주체화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사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리연구부는 1920년 4월 천도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사업의 내용은 ㉠ 지방조직의 건설 ㉡ 순회 강연회를 통한 교세의 확장 ㉢ 출판 사업 등 세 가지였다. 3개월만에 지방지부 10개소와 600명의 부원을 확보하면서 천도교 지방조직이 새롭게 재구축되었고, 천도교의 젊은 이론가 이돈화는 1920년부터 1922년 3년간 총 79회의 강연에 참가하면서 매월 2회 이상 전국을 순회하였다. 지방조직의 확대와 강연을 통한 교세 확산은 천도교 근대화의 실질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벽』이 창간되었다. 『개벽』의 창간에 천도교의 치밀한 종교전략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천도교는 『개벽』을 종교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도교는 『개벽』을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적 공공매체로 성장시키는 데 진력했다. 천도교는 『개벽』을 탈종교화하고 종합잡지라는 매체형식을 통해 여론의 구심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개벽』은 일관된 정치지향과 현실참여의 태도를 보이며 1920년대 사회 모순의 중심에 서있었다. 의식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그 여론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개벽』의 강렬한 정치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식민체제의 탄압을 받아야 했지만, 이는 역으로 『개벽』의 사회적 비중을 극단적으로 확대시키는 결과 또한 가져오게 되었다. 창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개벽』은 식민지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되었다. 이로 인해 독자대중의 정치적 기대와 여망을 배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개벽』은 스스로 선택한 위험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개벽』의 사회적 헤게모니는 곧 천도교의 위상을 굳건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개벽』의 표면적 비종교성이 결과적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벽』의 정치성은 종교적 상상력과 정치적 상상력이 결합된 형태를 보인다. 『개벽』은 창간사(1920.6)에서부터 "신은 스스로 渴仰이 없는지라. 인민의 소리에 응하여 또한 기 渴仰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명시하여 신과 인민의 소리는 같은 것이다라는 대명제를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인민의 의지 속에 신의 의지가 현현된다는 의미이다. 신의 의지가 인민의 의지를 실천하는 속에서 확인된다는 태도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명확히 분리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민중적 종교관의 소산이다. 1920년대 천도교 선교전략이 인민성을 중심에 둔 政敎合一, 종교의 인민적 세속화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민의 삶과 연계된 사회정치적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었다. 『개벽』은 근대문명, 미디어, 정치성, 인민성이라는 기제들이 결합된 근대미디어로 근대성의 핵심 기제이자 소통회로였고, 그 내용을 통해 천도교의 종교적 이상주의라 할 수 있는 인민성이 선전되는 장이었다.
또한 『개벽』은 초기 근대사회의 핵심 사상이었던 사회진화론의 반인민성을 해체하는 반사회진화론적 태도를 분명히 한다. 사회진화론을 부정함으로써 근대 초기 한국 계몽주의 정신사의 전 과정을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상호부조의 정신에 기반한 ‘강약공존주의’, ‘병건상보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1차 대전 이후 우승열패적 문명에 대한 강렬한 공포와 한국의 식민화에 대한 현실진단이 반영된 것이었다. 사회진화론을 폐기하고 상호부조의 사회질서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당면한 개조의 본령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상호부조는 원칙적으로 평등한 상호관계, 자립과 자존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사회진화론의 추상적 낭만성 대신, 상호부조론의 비극적 현실주의 세계관을 주창한 초기 『개벽』의 사상적 지평은 ‘적시대성’으로 향하였고,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인민성에 근거한 강렬한 종교적 유토피아즘이 지면을 장식했다. 『개벽』은 출범 당시부터 사회주의와 친연한 신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종교적 이상주의의 경향성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천도교가 전략적 동반자로 선택한 사회주의의 확산과 진전 과정이 자연스럽게 『개벽』 지면에 반영된 것과 천도교측이 그러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자기화한 이중의 결과이다.
2. 『개벽』의 문학: 천도교 인민주의의 선전 회로
초기 근대사회에서 문학은 서구 근대성과 연계된 신지식의 일종이자 첨단의 언어였다. ‘정론의 강요된 부재’라는 시대 상황에서 문학은 당대 지식인들의 내면의식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체형식이었다. 문학은 그 점에서 근대성과 정치성, 그리고 문명의 권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회제도였다. 아울러 근대문학은 그 내적 맥락에서 천도교의 종교적 이상주의와 소통할 수 있는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근대문학이 갖는 강렬한 사회비판의식은 보둔 종교가 공통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억압받는 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구원의 목소리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 대부분의 근대종고들은 문학의 형식을 선교의 수단이나 종교이념의 대중적 설파의 목적으로 활용했다.
『개벽』이 문학을 중시한 것도 일차적으로 당대독자들의 근대문학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간접적으로는 천도교 사회이념의 확산 의도와 연계되어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방정환, 박달성 등의 천도교청년회의 주도세력이 『청춘』의 현상문예를 통해 근대사회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을 학습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개벽』의 주도층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실제로 근대문학이 지녔던 다양한 기제들과 한국적 특수성을 예리하게 활용했다. 그들의 문학 중시 정책은 문학의 은유적 정치성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던 신지식층과 독서대중의 기대를 사로잡았다. 『개벽』의 문학은 그 자체가 『개벽』이 추구한 정치성의 간접적 표지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개벽』의 문학은 『청춘』의 문학이 1910년대의 상황 하에서 은유적 정치성을 발휘했던 것과 달리, 3·1운동 이후 미디어의 허용에 의한 근대문화제도의 성장 및 사회전반의 다원적 변화는 문학이 은폐된 정치성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는 원인이 되었고, 그 내용의 정치성이 구체적으로 요구되었다. 따라서 『창조』의 동인들이 문학의 절대성을 숭배했던 것과는 달리 『개벽』의 주역들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다. 그들의 이념지향과 『개벽』이라는 매체가 담아낼 문학의 성격을 결합함으로써 근대문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감행했다. 이렇게 구성된 『개벽』 문학의 특질은 천도교 인민주의의 선전 회로로 문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개벽』은 초기부터 천도교 인민주의 시각에 의해 작가와 작품을 선별했으며, 그 결과 1923년 후반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적 가치에 접근해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과 연계된 사회주의 문학으로의 질적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개벽』이 사회주의적 가치에 능동적인 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개벽』을 통해 실천되었던 천도교 인민주의라는 종교정책이 작동하고 있었다.
전반기 『개벽』(1920.6~1923.5)의 문학을 이끌었던 인물은 문화부장 현희운(현철)을 필두로 현진건, 염상섭, 김형원, 김억, 황석우, 양건식, 김소월 등이었다. 그리고 이익상, 박종화, 주요섭, 김동인, 나도향, 김명순, 김유방도 몇 편의 작품을 기고했고, 방정환의 참여도 활발했다. 이렇게 볼 때, 전반기 『개벽』에는 ‘폐허파’의 적극적 참여 흔적이 뚜렷하다. 1920년 7월에 결성된 『폐허』의 동인은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변영로, 염상섭, 이익상, 민태원 등이었고 이들과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 운동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보다 더욱 두드러진 현상은 폐허파의 일원이었던 황석우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전반기 『개벽』에 대거 포진되었다는 사실이다. 황석우는 1910년대 유학생 사회에서 아나키스트로 유명했고, 당시 염상섭은 황석우의 추종자였다. 사회주의 경향성을 대표하는 『신생활』에 염상섭의 묘지(1923)가 연재된 것도 그러한 염상섭 이력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황석우가 1916년 아나키즘 운도의 일환으로 동경에서 간행했던 『근대사조』와 관련된 인물들이 김억, 최승구, 이인상, 안재홍, 정태신, 최상호, 그리고 현희운이었다. 그리고 『개벽』 창간의 주역이었던 방정환이 일찍부터 사회주의적 지향을 드러낸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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