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사상특강 정악과 산조 이합집산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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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악과 산조, 이합집산의 상상력
1. 들어가면서
정악은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들여온 궁중제례악을 조선 세종 때 악성 박연을 통해 정비하여 여러 악기의 화음을 중요시하고, 안정감 있는 리듬과 최소한의 가락 변동을 통해 왕실의 체계와 권위, 규율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의식이나 의례에 쓰였다. 정악은 지식인층의 문화인 풍류를 상징하였고, 우리 조상들의 삶에 자연, 자신, 사람, 느림과의 교감을 제공해 왔기에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고 주변에 그치는 제례악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민들이 가진 수만 가지 인생의 굴곡에 와 닿을 수는 없었고, 궁중과 일부 상류 계층에게만 통용되는 정적인 음악이었기에 협주로서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지 않은 고인 연못의 물처럼 점차 힘을 잃어가 지금은 전통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사람이 음악을 들으며 기대하는 자유로움, 새로운 정서의 환기와는 거리가 먼 틀에 갇힌 느낌과 뚜렷한 연주의 목적성, 그리고 지루함은 정악을 쉽사리 받아 들일 수 없게 한다. 지금도 사극의 연회 장면을 통해 들려 오는 정악은 왕과 가신들의 술잔과 대화가 오가는 배경에 흐르는 음악 이상의 역할로 규정 짓기 어려운 현실이다. 복잡하고 득달 같이 흘러 가는 세상 속에서 “슬로우푸드”, “슬로우시티”가 역으로 주목 받고 있는 현세에 정악은 과연 느림의 미학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을까.
반면 산조는 19세기 말, 전통 사회의 해체기에 생겨난 것으로 해체기의 "흐트러짐", "불안함"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자연스런 개성미를 추구하여 당시 민중들에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민중음악이라 할 수 있다. 사회신분제도 등 봉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욕구가 곳곳에서 분출하던 사회적 전환기에서 조선후기 사회 모순, 갈등을 담아내던 판소리의 영향을 받아 악기연주자가 스스로 판소리를 자기화하려는 욕구를 담아 판소리의 특징적인 선율 형태를 부분적, 즉흥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고, 엇박자와 정형화되지 않은 변덕스러운 가락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후 판소리의 재구성이라는 보다 전체적인 수렴 과정을 거쳐 산조라는 독창적인 음악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민속음악계를 대변하는 독창적 연주 기법으로 정악의 계보에서 이탈한 실험적인 창작음악으로 볼 수 있기에 이를 두고 산조를 가사 없는 판소리, 즉 “무언가”라 칭하기도 한다.
산조의 자유롭고, 기교 넘치는 현악기의 변주는 오늘날에 이르러 가장 대중적인 현악기라 할 수 있는 기타 연주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발전성이 엿보이며 이는 국악의 유유한 흐름을 넘어 세계라는 바다에 당당히 본류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선보인다. 다만, 현대의 산조 계승자들이 20세기 스승을 뛰어넘는 변주와 시대 정신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어 정형화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산조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20세기 서양 음계의 “조”에 치중하여 표준화하려는 시도 중점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자칫 산조가 세상 빛을 보고 서민들에게 사랑받던 초심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상존하기에 19세기의 한국적 감수성을 21세기 산조에 녹여 내고, 이를 있는 그대로 향유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겠다.
2. 정악, 반듯하게 흩어져 가다.
정악은 국악 가운데 넓은 의미의 아악을 일컫는 말로 아악은 아정(雅正)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이라는 말로, 문묘제례악 등의 궁중음악 일부와 더불어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모든 음악을 지칭하며 속악의 대칭으로 쓰인다. 아악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를 거듭하다가 105년 송나라의 대성부에서 《대성아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고, 한국에는 1116년(고려 예종 11)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아악기 일습 및 아악에 수반되는 춤 사위에 쓰이는 의관, 무의, 악복, 의물 등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냄으로써 아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는 악공을 명나라에 유학 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ㅜ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정리되었다. 세종은 악리학자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아악을 정비케 하면서 악장, 악보와 악기를 일일이 흠정하는 등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될 큰 사업을 벌였다.
박연은 12율관과 편경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으면서도 아악을 주(周)나라의 것에 가장 가까운 아악으로 복원하여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제악의 임무를 전관하게 된 박연은 많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 제사 등의 아악보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은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회례연 등에도 기악(妓樂)이 등장하여 아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는 동안 악인(樂人)과 악기가 산실되어 아악은 그 복구가 극히 어려운 형편에 놓였으나 1647년(인조 25) 이후에야 겨우 종묘, 사직, 문묘 기타 다른 제향에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다.
숙종, 영조, 정조 등도 쇠미하여 가는 아악을 되살리려고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세종 때의 아악은 끝내 되찾지 못하고 위축일로의 길을 밟아 근근이 그 명맥만 유지하여 왔다. 더구나 1910년의 국권피탈로 원구 ·사직 ·선농 ·산천 등 제향이 폐지되어 여기에 쓰이던 아악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공자의 제향이 존속되어 거기에 쓰이는 문묘제례악 중 석전악의 일부와 팔일무가 연주되고 있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