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도덕교육]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초등도덕교육에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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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초등도덕교육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초등도덕교육에의 적용
Ⅰ. 사상에 대한 개괄
플라톤이 참된 이데아를 꿈꾸며 영혼의 순수함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오직 현재적 삶 밖에 없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살아있다고 하는데, 죽음은 이 둘을 분리시키므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좋고 나쁜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이라고 했다. 선과 정의는 바로 지금, 현실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상주의에서의 선은 그 자체로 순수하며 무조건적으로 추구되어야 하지만, 현실주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선은 참된 선이 아니며 인간에게 유익함을 주지 않는 선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이 좋은가’하는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가 좋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선이나 좋은 것을 말하든지 간에 만약에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동의할 수도 없으면 소외된 가치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을 밖으로부터 억압해 들어오는 타율적 강제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아직까지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두발자유화’는 타율적 강제의 사례가 될 수 있다. 학교 측에서는 긴 머리나 파마머리는 단정하지 못하여 학생신분에 어울리지 않고, 학생들이 학업보다 외모에 더 신경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두발을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존엄성을 짓밟고 획일화시켰다는 점에서 ‘소외된 가치’이며 ‘타율적 강제’를 위한 핑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것을 정의하면서 각자 바라는 것이라고 한 의미는 되새겨 볼만하다. 아무리 완벽한 선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승인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오직, 그런 경우에만 선은 자발적 의욕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는 좋은 것을 지향한다. 그때마다 지향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행위의 목적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수행되는 모든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는 행위는 맹목적이며, 이러한 행위는 비정상적으로 간주된다.
추구하는 행위가 다양할수록 목표 또한 다양해진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은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함이었다. 좋은 점수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또 다른 행위이고 평생 대학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려면 대학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처럼 추구해야 할 좋은 것들의 대다수는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 된다. 그런데 모든 행위가 예외 없이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다른 목표를 추구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삶이 공허한 맹목적 유희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궁극적인’ 목적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은 목적은 무엇인가?’하고 묻고,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로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으므로 행복은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가치이다. 또한 행복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수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며, ‘무엇을 위해 행복하려고 하는가?’란 질문이 성립할 수 없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좋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는 선을 어떤 당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원칙적인 자연적 욕구라고 하였다.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 그 자체가 좋은 것이며 그것이 선이다. 또한 최고의 선은 당위적으로 강제되는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추구하고 욕구하는 대상인 행복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삶의 윤리적 이상이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이념적 가치로 설정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현실세계일 뿐이며 이상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현세적인 욕구와 가치가 어떤 이념적 초월성에 따라 부정될 수 없다. 모든 자연적 욕망이나 욕구는 원칙적으로 긍정된다. 문제는 욕구억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다양한 욕구들에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욕구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해 삶을 완성시키려고 하였으며 행복이란 그러한 욕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이 쾌락이나 부나 명예처럼 명백히 보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병들었을 대는 건강을, 가난할 때는 부유함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다. 이 말은 행복을 규정할 수 없는 추상이라고 하기 위함이 아니라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교정하기 위함이다. 즉, 무엇이 진짜 행복인가를 묻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은 그 자신의 고유한 일과 기능을 완전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플라톤이 말한 ‘일’의 개념과 같다. 우리가 자신의 고유한 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상태가 바로 행복이며 그때 느끼는 내면의 희열과 기쁨이야말로 참된 행복에 수반되는 참된 기쁨이자 쾌락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고유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