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4월혁명과 장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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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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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4월혁명과 장면 내각
*목차*
1. 이승만정부의 독재화
2. 4 19혁명
3. 장면정부의 수립
1. 이승만정부의 독재화
한국전쟁의 혼란 중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고 이것이 곧 독재정권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직전의 5 30선거에서 참패를 당한 이승만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조직하고,(1951. 11) 이를 이용하여 재집권을 획책하였다. 우선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가 임박하자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현행헌법으로는 자신이 재선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대통령직선제로의 헌법개정을 위해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즉, 피난 수도 부산에서 공비토벌을 빙자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야당의원 47명을 체포 감금하였던 것이다.(1952. 5. 26)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정권은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한 소위 발췌개헌안을 만들고, 이를 국회에서 기립표결에 붙여 통과시키고 말았다.(발췌개헌, 1952. 7. 4) 이로써 대통령직선제가 실시되어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압승을 거두고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우선 자유당 내부에서 막강한 민족청년단의 조직을 가진 위협적 세력인 이범석을 제거하고 대신 이기붕체제를 성립시켰으며(1953), 1954년의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유당은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을 국회에 발의하여 표결에 들어갔다. 그 결과 총 203명 가운데 135명이 찬성하여 개헌선인 3분의 2선에 해당하는 135.3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사사오입의 이론을 내세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사사오입개헌, 1954. 11. 28). 이로써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고, 1956년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돌연한 서거에 힘입어 투표자 수의 56%를 득표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때 부통령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이기붕이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배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제3대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1958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자유당의 의석이 줄어들게 되자 이승만은 야당을 탄압하는 등 독재화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즉, 1958년 1월에 소위 진보당사건을 일으켜 조봉석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서 언론과 지식인을 탄압하기 위해 대공사찰의 강화와 언론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 보안법개정안을 야당의원들을 국회 지하실에 감금한 가운데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2 4파동, 1958, 12, 24). 또한 당시 야당지였던 을 폐간시켜 야당과 언론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 3월에 실시된 제4대 정 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이번에도 야당후보인 조병옥이 급서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될 수 있었지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극심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3 15 부정선거였다. 이러한 독재정치와 잇단 부정선거로 인해서 이승만정권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 4월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2. 4 · 19혁명
◈ 4 · 19혁명의 배경
1945년, 35년동안의 일제의 억압과 질곡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강대국들에 의해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 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 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찿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