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추도분 항일구국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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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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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추도분(鄒韜奮)
1. 서론 : 추도분은 어떠한 인물인가?
2. 본론 : 추도분과 《생활》주간 / 9ㆍ18사변과 추도분의 전변
민족연합진선의 제시와 구국회운동 참여 / 항일전쟁 참여와 민주정치 요구
3. 결론 : 맺는 말
항일구국운동가민주투사 언론인
1.서론
추도분은 어떠한 인물인가?
추도분은 1895년 11월 5일 복건성 영안현(永安縣)의 몰락해 가는 봉건 관료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은윤(恩潤)이었고, 도분이란 이름은 그가 사용한 필명 가운데 하나였다. 어릴 때 전통 교육을 받다가 15세 때 복주(福州)공업학교에 입학하면서 신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남양공학(南洋公學)을 거쳐 1919년 기독교 재단인 세인트존스대학에 입학한 뒤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 속에서도 신문기자를 꿈꾸면서 잡지에 투고하고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1922년 황염배(黃炎培)가 이끌던 중화직업교육사(職敎社)에서 발간 된 《교육과 잡지》의 주편으로 들어갔다. 이 후 1926년 《생활》주간의 편집을 맡았고, 1931년 918사변이 발발한 뒤 ‘부저항정책’에 반대해 대일항전을 주장하다가 국민당 정권과 충돌하여 1933년 7월 결국 탄압을 피해 해외로 피신했다가 2년 뒤 귀국해 곧바로 항일구국운동 단체인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1937년 항일전쟁 시작 후 그는 국민당과 정부에 대해 끈질기게 전민(全民)항전과 민주정치의 실시를 요구하다가 41년에 다시 홍콩으로 피신해 언론활동에 종사하였고 홍콩이 일군(日軍)에 함락된 뒤 중공 점령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암이 발병해 1944년 7월 24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추도분은 초기에 계급투쟁에 반대하고 민생주의 실시를 요구하다가 후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공에 입당 신청까지 하는 등 1930~40년대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한 중국 지식인들의 겪었던 변화를 대표하였다.
2. 본론
추도분과 《생활》주간
추도분은 1926년 1월 생활주간의 편집을 맡게 되면서부터 저널리스트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1925년 10월에 직교사 내부교류용 소식지로 창간된 생활주간은 초기에 다른 신문의 기사에서 발췌한 직업교육 소식을 주로 실었지만 그 당시 편집을 맡던 왕지신(王志莘)이 사퇴한 뒤 추도분이 주편을 맡아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잡지로 개편했다. 이 후 직업교육 소식을 벗어나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시평·사론·수필·여행기·전기·통신 등 다양하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기사를 실었다. 또 독자들의 생활이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독자신상(信箱)을 개설하였다. 이는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 중 일부와 이에 대한 추도분의 의견을 싣는 형식으로, 간결하였지만 정곡을 찌르는 표현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생동감 있고 서민적인 문장을 사용해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잡지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중국이 국민혁명을 통해 드러난 중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라, 1926년 말부터 광범위하게 전개된 노동운동의 급진화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때라 대중생활문제 개선을 잡지의 목표로 삼았던 그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27년 3월 추도분은 이란 사설에서 처음으로 당시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상세히 제시했다. 농민·공인(工人)·도제·잡부(工役)·여복(女僕)의 생활고는 모두 이제까지 본간(本刊)의 소재였으며, 생활주간이 민중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을 대신해 사회에 호소하려 했던 것이고 발간 동기는 철저하게 민중의 복리가 전제이며 앞으로도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철저히 민중의 처치에 서겠다고 밝혔다. 또 민중의 구체적 기준으로 군벌과 탐관오리, 사욕만 채우는 정객, 직공을 학대하고 인도주의를 외면하는 자본가, 유산에 의지해 무위도식하는 자들을 제외한 정당한 직업을 가졌거나 가질 준비를 하는 평민, 그 중에서도 특히 잘못된 제도의 압박을 받는 부분이라고 정의하고 기준은 계급적 요소보다 도덕성, 직업의 유무 등의 요소를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추도분이 사회 현상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불평등을 없애는 사회혁명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인식했다. 단지 사회혁명이 두 가지 상반된 경로를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 중 첫째는 계급투쟁이라는 급진적 경로로 그 끝은 살인·방화와 비윤리적인 잔혹함이고, 둘째는 손문이 주장한 민생주의의 경로였다. 이 중 어떤 경로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 그는 만약 민생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전쟁만 거듭해 혼란을 일으킨다면 실제로 곧 계급투쟁의 경로를 장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관점은 당시 확산되던 농민운동에 대한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1월 생활주간에 실린 이란 글에서 호남과 호북지역의 농민운동에 대해 농민들이 자각하여 피압박의 처지에서 벗어났다고 환영하고, 농민협회를 통해 조직화하면서 토호열신(土豪劣紳)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사회적 제재력을 가지게 된 것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농촌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운동’을 통해서가 아닌 평균지권(平均地權)과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에 따라 민생주의의 실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27년에 추도분은 생활주간에 영각(靈覺)이란 필명으로 삼민주의에 관한 여러 글을 실었는데 삼민주의를 중국의 사회개조를 위한 이론적 근거로 삼고 그 중에서도 민생주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우선 추도분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민생, 민족, 민권’의 순서로 재배열하고, 민족과 민권의 항목에 모두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족(민권)주의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는 민생주의를 글자 그대로 인민의 생활이라고 규정하고 하층 민중의 생활난과 실업문제 해결이 곧 민생주의 실현이라고 제시하고 민생주의 실현을 통해 민중의 실생활 문제가 해결되면 사회혁명은 문제가 되지 않고 계급투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