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사시사 내용학과 교육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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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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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1. 어부사시사 내용학
1) 윤선도의 생애
2) 어부사시사의 배경
3) 어부사시사의 내용
4) 어부사시사의 형식
5) 어부사시사의 갈래 문제
6) 어부사시사의 문학사적 의의
2. 어부사시사에 대한 교육적 접근
1)「어부사시사」의 교육적 가치
2) 「어부사시사」의 학습 내용
3) 협동협력학습을 통한 「어부사시사」교수학습 방법
어부사시사 내용학
1)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 서울에서 태어나 현종 12년(1671)에 보길도에서 8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친 유학자요, 정치가요, 시가인이었다. 8세 때 큰집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의 가통을 잇게 되었으며, 청소년기는 부유한 환경에서 실력을 배양하고 인격을 향상시킨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게 된다. 30세(광해군 8년, 1616)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동서 분당의 갈등이 심화되고 이이첨과 강석기 일파가 갖은 횡포를 자행하자 그들의 죄상을 상소문으로 올렸다. 그러나 그의 직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42세(인조 6년, 1628)에 다시 상경하여 별시에 등과하고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걱정하여 향족과 가동 수백 명을 규합하여 강화도로 향했으나 이미 인조는 적에게 항복을 하고 왕자 등은 붙잡혀 간 뒤였다. 이 비보에 접한 고산은 제주도로 가서 일생을 마치려고 배를 몰아가던 중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여기서 세상을 잊고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고자 마음먹었다. 병자호란이 고산을 자연에 들게 한 직접적 동기가 된 것이다. 52세 때 위정자들이 윤선도를 질투하여 탄핵하였다. 병자호란 때 배를 타고 강화도에 도착했다가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간 것을 알고도 끝내 달려와 문안드리지 않은 점 등을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다음해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금쇄동과 부용동에서 은거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지었다. 65세 가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60수를 지었다. 이후에도 정쟁 속에서 벼슬과 귀향을 반복하였으며 85세에 보길도 부용동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2) 어부사시사의 배경
①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준 전대의 ‘어부가’
악장가사 속의 ‘어부가’는 꽤 오래 전부터 대중들에게 익숙하게 불린 노래로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후 농암 이현보가 지은 ‘어부가’는 고려 문인들의 소상팔경 시와 중국 문인들의 어부 노래에서 집구하여 시상을 정리하고, 일부 중복된 가사를 삭제하여 정연한 구성을 갖추었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있었던 ‘어부사’는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옛 시를 집구하여 곡을 붙인 것이다. 이것을 읊조리면 강바람과 바다의 비가 어금니와 뺨 사이에 생겨 사람들로 하여금 표연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설 뜻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음향이 말에 상응하지 않고 뜻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은 대저 옛 것을 모으는 데 얽매인 탓이다. 따라서 옹색한 결함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더 보태고 우리말을 사용해서 사계절을 각 한 편으로 하고, 한 편을 각 10장으로 구성하였다. -중략-
② 가어옹(假漁翁)
어부가가 여말 선초에 광범하게 향유된 것은 당송시대의 작품들이 많이 유입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적 이미지와 정서면에서 여러 모로 호소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극심한 격변기를 늘상 ‘물러남’과 ‘나아감’의 긴장 속에서 보내야 했던 사대부의 존재 자체가 가어옹의 형상과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가어옹’이란 가짜 어부, 곧 낚시가 생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무얼 낚는가? 쉽게 말해 세월을 낚는다. 시선은 바다를 향하고 있지만 마음은 저 머나먼 궁궐을 향하고 있다. 몸은 강호자연에 의탁하고 있지만, 불러주기만 한다면 언제든 낚싯대를 접고 현실 정치의 장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왕조의 출범 이후 ‘어부가’는 사대부 계급의 미의식을 대표하기에 이르렀다.
③ 사상적 배경
고산이 생존했던 조선조가 유가사상 중심의 사회였고, 그는 철저한 유자였으나, 이 같은 사실이 문학연구에 있어서 고정관념으로 적용되어 모든 작품 세계를 유가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해 온 점은 재고의 필요가 있다. 고산이 생존했던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의 극도의 혼란을 겪으며 당쟁 사화가 가열되어, 이런 시대상황에서 비록 유교사상이 투철했던 인물일지라도 회의, 좌절 등 자신의 현실인식 여하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동양의 3대 사상이 유 불 선이라 할 때 이들이 우리 민족문학에 끼친 영향이 크며 고산문학 역시 이러한 특성이 나타난다.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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