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5 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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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5 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권
- 目次 -
Ⅰ 박정희의 출신
Ⅱ 군사정권의 등장
Ⅲ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
Ⅳ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3선개헌 반대투쟁
Ⅰ. 박정희의 출신
불행했던 일제 강점 시대의 조선 사람으로서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이 되어 그 침략 전쟁을 도운 사람들은 대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본 제국주의의 육군사관학교나 그 괴뢰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및 괴뢰 만주군의 장교가 된 사람들이다. 둘째는 강점 시대 말기에 이른바 지원병으로 가서 그 하사관이나 병졸이 된 사람들이고, 셋째는 역시 강점 시대 말기에 학병으로 끌려가서 간부후보생이 되거나 병졸이 된 사람들이다. 넷째는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기 직전에 강제 징병으로 끌려가서 그 병졸이 된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학도병이나 징병도 목숨을 걸고 피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대체로는 부득이 끌려갔다고 할 수 있다. 지원병의 경우 철없이 우쭐거리며 제 발로 간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가난한 농촌 청년들이 살 길을 찾아서 나간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간 사람들의 경우 대한제국 시대에 유학 갔다가 한일합방으로 그대로 일본군에 편입된 사람들이 있고, 그 밖에는 모두 제 뜻으로 간 사람들이다. 만주 괴뢰 군관학교 출신도 전적으로 제 뜻으로 간 것은 마찬가지이다.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다시 상기해 보면,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사람을 모두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교육의 제일선에 세운 초등교원 양성 기관이었던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자의로 만주 괴뢰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군관학교 졸업생 중 성적이 우수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 간 후, 괴뢰 만주군 육군 중위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령으로 근무하던 중, 군대 내의 좌익 조직에 상당히 중요하게 가담했다가, 여순 반란 사건 후의 숙군(肅軍) 과정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 내 좌익 조직 조사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또 "군의 공산당 비밀 조직을 소상히 불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함으로써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 일은 국방부 정보국장으로서 숙군 작업을 총지휘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1946년부터 35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국방경비대 창설 요원에서 시작하여 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 등을 지낸 미 육군 대위 출신 하우스만 등이 증언하고 있다. 하우스만은 특히 "한국군 내부의 거의 모든 적색 조직을 샅샅이 폭로한 것은 확실히 그의 목숨을 건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권력에 대단히 집착한 군인이었던 것 같아서 이후 군사 쿠데타를 세 번이나 기도하여 결국 성공하게 된다. 첫 번째 기도는 이승만 정권의 첫 임기가 끝나게 되었을 때,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서 벗어나면서까지 집권연장을 위해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시점이었다. 이 때 박정희를 포함한 한국 군부의 일부가 주한미군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결행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는 이승만 정권 말기 그 독재와 폭정 때문에 국민의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학생과 청년층 중심의 진보 세력이 급성장하는 사실을 미국이 우려하게 되었을 때였다. 또다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군부의 일각에서 쿠데타 계획이 있었으나, 4.19의 폭발과 이승만의 하야로 유보되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장면 정권 성립 후 야기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1961년으로 들어서면서 다소 가라앉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서둘러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게 되었다. 하우스만은 회고록에서 5.16이 일어나기 45일 전, 즉 1961년 3월 1일자로 한국군 내에 쿠데타 계획이 있음을 그의 상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맥아더도 적어도 한 차례 이상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군 내부의 쿠데타 기도에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2일 후인 5월 18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하우스만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광범위한 군사 혁명 과업들을 얘기했다"고 했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서 군대 내 좌익 조직에 깊숙이 가담했다가 "한국군 내부의 거의 모든 적색 조직을 샅샅이 폭로하여" 목숨을 건진 경력을 가진 박정희 소장 중심 군사 쿠데타가, 역설적이게도 미국 쪽의 묵인과 방관과 협조 아래, 민주적으로 성립된 합법 정부를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후 한국은 길고도 어두운 군사 독재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녀원에 3일간이나 숨어 있다가 나와서 정권을 군인들에게 넘겨 준 민주당 정권 국무총리 장면은, 외부와의 연결을 일체 끊고 숨어 있었던 이유를 질문 받고 뒷날 그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결국 밝히지 못하고 죽었다.
Ⅱ 군사정권의 등장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군사쿠데타는 일차적으로 부패 무능한 민주정권하에서 통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이 성장하는데 대해 군부가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 등 제3세계에서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정권을 창출하여 세계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59년 쿠바 혁명과 남베트남의 반정부 무장투쟁, 그리고 1960년 한국의 4월 민주항쟁 등에 의해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강력한 반혁명적 전략을 채택하여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 여기서 주목된 것이 제3세계 국가의 군부였다. 이들 지역에서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얻었다.
한국의 군부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와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힘입어 가장 효율적으로 조직된 사회집단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미국에서 군사연수 등을 받으면서 친미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5.16 쿠데타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지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