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

 1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
 2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2
 3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3
 4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4
 5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5
 6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6
 7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7
 8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8
 9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9
 10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0
 11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1
 12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2
 13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3
 14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4
 15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1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김수영 - 생애와 작품 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수영[金洙暎](1921~1968)
1. 생애와 작품 활동
김수영은 1921년 11월 37일, 서울 종로 6가의 대지가 100여 평 되는 큰 집에서, 지전(紙廛)을 경영하는 상인 김태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수영의 가계는 정확하지 않은데, 할아버지 김희종은 정3품 통정대부 중추의관의 무반으로 500여 석을 거두는 대지주로 지냈다고 하고, 또는 중추원 의관은 유명무실한 자리로 양반귀족으로서의 정통성은 희미하다고 보아 중인의 신분이었다가 부유함의 결과로 관직을 가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명인『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소명출판 p.44~45
위로 두 형이 일찍 죽음으로써 사실상 첫 아들로 자란 김수영은 네 살 때 유치원, 다섯 살 때 서당을 거쳐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28년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8살이 되기까지 서당을 다니며 동몽선습, 천자문, 논어, 맹자 등을 공부하였다. 모더니스트 김수영에게 유년기의 한문 학습과 유교적 세계관, 윤리의식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 보인다. 그는 겁이 많고 외로움을 잘 타는 소년이었으나 수재였고, 공부벌레였다. 그런 그에게 보통학교 6학년 때, 급성 장티푸스와 뇌막염의 후유증으로 중학입시에 실패하고 선린상업 전수과에 겨우 입학한 것은 큰 상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선린상업학교 시절 학업성적은 우수했으나 내내 외톨이었으며 부친의 경영력 부족으로 기울어 가는 가세에도 상업보다 영어와 미술을 더 좋아했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연극대사를 잘 외웠고, 영어를 잘해 오스카 와일드를 원서로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1941년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기를 바라는 집안의 기대를 뿌리치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동안 그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걸어 가세를 줄여 이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의 동경유학은 ‘경성제대나 연전이 마음에 차지 않은’ 그의 지적 허영심과 먼저 동경으로 건너간 친구 고광호의 누이동생 고인숙에 대한 열정의 충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경성북예비학교에 들어가 대학 입학 준비를 하다가 ‘이름뿐인 일본 유학생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없기에 그만두고,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연극연구소를 찾아갔다. 그는 연극공부와 함께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습작하였다. 그는 소년시절에 사회현실이나 민족현실에 대한 도피적 태도가 강했는데, 이는 집안에 대한 도피적 태도와 관련이 있고,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는 부잣집 장손으로 받기만 하며 자랐고 수재형이었으면서도 잦은 병치레로 실패를 거듭한 자존심 강한 소년 김수영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1943년 조선학생 학병제가 실시되고 이광수, 최남선 등이 학병 권유차 동경에 오는 상황에서 징병을 피해 서울로 돌아왔다. 연극 활동을 하며 징병을 피하다가 만주 길림으로 떠난 가족들에게 1944년에 갔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그해 9월에 가족들과 서울로 돌아왔다. 1945년 이후 김수영의 생애 이력은 그가 쓴 여러 산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1946년 무렵부터 김기림, 김광균, 김병욱, 임호권, 박인환, 양병식 등의 문인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게재하는 등 스스로도 밝힌 것처럼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하게 된다. 이 시기 특기할 것은 김수영이 임화와 만난 것이다. 임화, 김수영 둘 다 연극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서로 만나게 되었고, 자주 만나면서 김수영이 임화에게 매료되었다. 이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사회주의에 대해 동조적인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광복 이후부터 6.25가 발발하기 이전까지 김수영은 그가 교우를 맺었던 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의 길로 접어든 것이 늦었다는 자의식 때문에 불안감과 강박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습작한 시에 대한 김병욱의 칭찬에 감격하기도 하고, 낡았다는 박인환의 지적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그 나름의 습작과 시론 공부에 몰두하였다.
1950년 4월 6살 연하의 김현경과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여 동거를 시작했고 서울대부설 간호학교 영어강사 자리를 얻어 생계도 꾸려나갔다. 그러던 중 전쟁을 맞고, 피난을 가지 않는다. 1950년 8월에 박계주, 박영준, 김용호 등과 의용군에 강제로 입대 북행하여 훈련을 받고 순천군 중서면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였다.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남하하여 집부근인 충무로 입구까지 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포로 신분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 생활에서의 친공 포로들의 조직적 투쟁, 미군의 강압적 대응, 반공-친공 포로간의 교차테러 등의 끔찍한 사건은 심약한 김수영을 압도하였을 것이고, 영어를 잘해 미국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 처참함을 피했다는 것은 그에게는 또 하나의 치욕이었을 것이다. 1952년 12월경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그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55년 6월 서울 마포에 정착하면서 이후로는 직장을 갖지 않고 양계를 하며 시와 번역에 전념하였다.
「사령(死靈)」을 비롯한 몇 편의 시를 통해 1950년대의 시대 상황과 관련한 시인의 고뇌를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은 4.19 이후의 일이다. 4.19와 함께 1960년대를 맞은 40세의 김수영은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시와 세계인식의 근본적 변혁을 생각한다. 산문적인 시를 쓰고, 내용은 우파정권, 미·소에 대한 공격, 남·북한의 비교 등 당시 충격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와 역사에 대한 구조적 성찰은 얻지 못하여 그의 혁명은 문학의 혁명, 시의 혁명에 머무르고 만다.
1960년대에도 김수영은 번역료와 아내의 양계, 장사로 생활하면서 직장을 갖지 않고, 시, 시론, 시평 등의 왕성한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폭로하였다. 그러던 그는 그의 일생 중 가장 첨예한 논쟁이었던 이어령과의 ‘불온논쟁’(1968)을 벌이고, 특유의 ‘온몸 시학’을 역설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문학 강연을 한 뒤, 1968년 6월 15일 귀갓길에 버스에 치여 사망한다.
Ⅱ. 작품 경향과 변모과정
* 처녀작에 대한 논란과 검토
① 소위 처녀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 해방 후 2년쯤 되어서일까? 아무튼 조연현(趙演鉉)이가 주관한 《예술부락(藝術部落)》이라는 동인지에 나온 「묘정(廟庭)의 노래」라는 것이, 인쇄되어 나온 나의 최초의 작품이다. (...중략...) 그 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마음의 신을 위한 참고로도 내보일 수가 없지만, 좋게 생각하면 시를 썼다는 증거는 될 것 같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