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임진왜란전후의 변화와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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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진왜란전후의 변화와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비판
Ⅰ. 서론
20세기의 한반도는 제국주의라는 식민지를 경험하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인 냉전의 산물로 분단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고속성장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경제에서는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러한 발전은 마르크스의 5단계 발전론에 따른 근대화를 위한 자본주의적 사회형성이론이나 식민지시대에 제시한 여러 식민사관적 이론으로는 설명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 발전 원동력을 찾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며 이는 한반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한국근대사를 인식하는 주류 방법론은 ‘내재적 발전론’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데, 흔히 이러한 입장은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방법론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의 변화와 근대화 의 과정, 조선역사의 한계와 근대화를 위한 시도를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Ⅱ. 왜란 전후 조선의 변화
(1)정치 지배층의 변화
1)조선전기 (개국 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성장)
조선 초기 정치의 중심 세력은 고려 말 등장한 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대신 중심의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 건국과정에서 큰공을 세운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실세력과 다른 공신들이 큰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이복 동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태종이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대신들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실제 업무를 6조에 맡겨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그 뒤를 이은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 집현전에서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자 했다. 군신간의 권력균형을 통해 안정되었던 정치구조는 세종의 사후 문종단종때에 이르러 정치적 실권이 다시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일부 사대부의 도움을 받아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성종 16년에 반포, 시행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건국이후 모색된 조선의 국가운영의 기본 방침이 확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 사회의 지배층은 양반 사대부, 그 중에서 특히 훈구세력이었다. 그들은 개국 공신들을 비롯해, 역대 왕들을 보좌하면서 제도를 정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실용학문에 능하고,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관학자들이기도 했다. 대개 한양부근 경기지역에 거주했던 이들은 많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인 여유도 누리고 있었다. 한편 이때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재야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층에 속하며, 향촌에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장보다는 유교경전 공부인 경학을 중시했고, 유학의 기본정신이 수기치인에 있다고 믿었다. 자연히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림이다. 사림세력은 성종때에 대거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훈구세력의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 진출하게 된 그들은 주로 3사 계통에 자리를 잡고 언론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에서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마침내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1516세기 4차례의 사화는 이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성격도 없지 않았다. 4차례에 걸친 사화, 즉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는 각각 경우가 달랐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빚어진 훈구 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듭된 사화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림 세력은 점차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지지기반을 넓혀가며, 마침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사림세력이 성리학이라는 정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훈구세력을 공격한 것에 비해 훈구세력은 특정한 정치 이론적 받침이 부족했으며 국왕 또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훈구세력에 대해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사림세력은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정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2)조선후기 (붕당정치와 붕당정치 극복을 위한 탕평책 그리고 세도정치로의 변질)
사림은 서원을 근거지로 향촌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향약과 농장을 토대로 세력을 키워갔다. 서원과 함께 사림들의 지위를 굳게 해준 것은 향약이었다.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규제하는 것을 지향한 향약은, 사회적으로 유교도덕이 행해지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중종 대에 조광조가 실시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그 후에 널리 시행되기 에 이르렀다. 선조 대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정치의 운영방식 또한 바뀌게 되었다. 종래 의 6조체제에서 3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중심으로 하는 운영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3사가 사림의 의견을 집약해, 그것을 공론으로 제시함에 따라 자연히 이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졌다. 사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앙 정계에서는 이조전랑을 통해 조정된 3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림의 의견은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었으며 그런데 이들의 의견 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직책이 이조전랑이었다. 누구도 그것을 무시하고서 독자적으로 정치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독특한 사림정치의 메카니즘이었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들 사이에 쟁점을 놓고 대립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붕당을 낳게 되었다. 붕당의 과정은 최초 이조 전랑의 임명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면화되면서 김효원 등 신진관료 중심의 동인과 심의겸 등 기성관료 중심의 서인으로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유성룡이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이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한다. 대북는 내정분야에서 임진왜란 후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면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이외에도 사고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등 각 분야에서 상당한 치적을 올렸다. 대외적으로는 쇠퇴하던 명과 청(후금)의 교체기를 관망하면서 중립외교노선을 통해 조선의 안정과 실익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소북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다.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조대비와 인선왕후의 복상문제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다가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집권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탁남이라 불렀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밀려나고 또 다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이건명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 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이런한 탕평정치는 왕이 중심이 되어서 붕당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 경제적 변화 위에서 지배층에게 부분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탕평정치는 기본적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과 정치 세력의 균형을 꾀하면서 기존 사회 체제를 재정비하여 안정시키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여러 정책들이 보수적인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