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고구려 수나라 전쟁 고구려 당나라 전쟁 고구려 수당 전쟁 백제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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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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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통일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수의 압박으로 돌궐의 세력이 약화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와 양제는 잇따라 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략해 왔다. 고구려는 병력 규모는 작았으나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냈고, 양제의 침입 때에는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12). 이를 살수대첩이라 한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건국 초에는 유화 정책을 취했으나 곧이어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왔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재 정치를 단행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에 대하여 강경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의 태종은 직접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다. 당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요동성, 개모성, 비사성 등을 빼앗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645). 안시성에서 군민이 합심하여 60여 일간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이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는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마침내 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쳐 당의 동북아시아 지배 야욕을 좌절시켰다.
고구려가 수 당과 싸워 이겨 그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의 국가 보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지만 당나라는 한 번의 패배로 물러서지 않고 그 뒤에도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혼자 힘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결국 신라와 손을 잡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으나 한강유역을 돌려달라는 연개소문의 요구와 판단착오로 회담이 결렬되어 마지막 남은 협조대상인 당나라와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 당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간의 항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당과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하려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당도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나 당 연합군이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