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의 전쟁 체험과 극복 의지 -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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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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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봉건의 전쟁 체험과 극복 의지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중심으로
목 차
서론
2. 전봉건이 겪은 전쟁과 변화
3. 「사랑을 위한 되풀이」
4. 결론
서론
전봉건은 1928년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명학리 10번지에서 부친 전형순과 모친 최성준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관리인 부친을 따라 도내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1945년에는 숭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여름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는 23세인 1950년에 『문예(文藝)』지에 시 「원(願)」·「사월(四月)」·「축도(祝禱)」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서정주(徐廷柱)와 김영랑(金永郞) 시인 등에 의해 추천을 받았던 만큼 시인으로서의 잠재력을 이미 충분히 인정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제 막 문단에 발을 디딘 시기는 한국이 가장 큰 불안을 겪고 있던 최악의 시기였다. 남과 북의 갈등이 언제 터질지 몰라 모두가 가슴 졸이던 때였다. 1945년 해방 이후의 한국시단 역시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고, 사회적 환경 역시 혼란과 갈등이 극심하였다. 새로운 시인이 등장할 만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건청, 「전봉건 시 연구」, 『동아시아문화연구』 35권 0호,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283쪽
현대성을 주창하며 한국 문학을 재건하려던 후반기 동인도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금세 사라져버렸다. 전봉건은 해방 후 1세대 시인이었지만, 기존의 질서나 가치가 모조리 무너져 있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닦아 나가야 하는 막중한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어를 사용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일본어로 사유하는 시인이었다. 한국어로 시를 써나가야 하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중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하던 전봉건은 부상으로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 전봉건은 가족들과 함께 대구 피난민 수용소에서 상당기간을 생활하였다. 피난지 부산에서는 그의 예술적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시인이며 친형인 전봉래가 자살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하지만 전봉건은 계속되는 비극 속에서도 시작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전쟁을 시 속에서 붙잡으려고 애를 쓴다. 그는 1988년에 작고하는 순간에도 연작시 「6·25」를 집필할 정도로 전쟁을 글로 쓰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전봉건은 줄기차게 한국 전쟁의 시적 형상화에 매달린, 거의 유일한 시인이다. 강연호, 「1950년대 전봉건 시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9권 0호, 현대문학이론학회, 1998, 6쪽
전쟁의 형상화가 전봉건 시의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시인 본인의 말은 그렇지 않다. “나의 시에 있어서의 주제는 전쟁이 아니다. 분명히 인간이다. 물론 그 인간은 전쟁 속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인간이다.” 전봉건, 「국민병으로서의 실험(상)」, 『태양신문』, 1953. 10. 6
작가가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봉건이 정말로 다루려고 했던 것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잃지 않는 것이 전봉건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전후 문학들이 보여주고 있는 부조리와 무기력함, 환멸과 우울함 같은 것들은 전봉건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전봉건의 시에서는 생명에 대한 찬탄과 자연, 사랑의 언어들이 힘을 얻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전봉건은 1988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시 창작을 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다양하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기교주의를 이룩하였다는 평과, 전봉건의 여성주의와 기교주의가 그의 모국어 콤플렉스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시의 내적 세계에 있어서는 전쟁의 상처를 정감적으로 수용하여 그 애상을 센티멘탈리즘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보고 전쟁으로 인한 인간상실을 서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정신의 질서를 회복하려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한편 이승훈은 전봉건의 오랜 시 창작 과정이 한국전쟁의 상처를 미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보면서 전봉건을 다른 많은 상투적인 시인들과는 달리 한국전쟁 의식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이소영, 「전봉건 시 연구」, 명지대학교 교육대학원 학위논문(석사), 1996. 2, 3-4쪽
물론 전봉건 시에 대한 한계를 말하는 평가도 있다. 전쟁이 인간 존재를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함을 먼저 인식하고 거기로부터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며 그 자리를 생명력의 추구와 에로스적인 미학이 대체하는 것이 전봉건 시작의 구조이다. 그런데 전봉건은 전쟁 체험의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극복의 과정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소박한 믿음과 관념적인 사고의 틀에 얽매여 있는 것 강연호, 위 논문 22쪽
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