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상담론 생애 인성론 수양론 상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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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의 상담론 생애 인성론 수양론 상담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산 정약용의 상담론
1. 정약용의 생애
2. 정약용의 인성론
3. 정약용의 수양론
4. 정약용의 상담론
※ 참고문헌
1. 정약용의 생애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정재원(鄭載遠:1730~1792), 어머니 해남 윤씨(1728~1770)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시서화 3절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어렸을 때의 자는 귀농(歸農)이었다.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삼미자, 다산, 사암. 자하도인, 태수, 문암일인, 탁옹, 철마산로 등이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 사의재(四宜齋)이다. 본관은 압해(뒤에 압해도가 나주목이 되어 나주 정씨라 부르기도 한다.) 정씨로 8대가 옥당(玉堂)에 들어간 명문의 집안이다.
1770년 10세 때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였다. 13세 때 두보의 시를 애독하고 수백 편의 한시를 지었다. 15세에 풍산 홍씨에게 장가들었다. 장인은 무과출신인 홍화보로 승지 및 황해도 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6세에 학문적 스승으로 받들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 보았다. 18세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서울에 올라와 공령문의 여러 체(體)를 공부하였고, 겨울에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에 뽑혔다. 20세에 과시(科試)를 익혔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고, 2월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增廣監試)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경의초시에 합격하고, 4월 회시(會試)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23세에 서교(천주교)에 관하여 듣게 되었고,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서학에 관한 책을 읽고 형인 약전과 약종, 이벽과 이승훈 등과 어울려 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5세에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아 복명했다. 36세 때 곡산부사에 제수되어 목민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져 문초를 받은 후 그 사건에 연루됨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11월 정일환 등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강진현으로 유배되었다. 47세에 다산(茶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동암과 서암 두 암자를 짓고, 장서 1천여 권을 쌓아 놓고 제자를 모아 가르치며, 독서와 저서에 힘쓰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후『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수백 권의 저서를 지었다. 57세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 18년의 유배 생활, 그리고 그 속에서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연구했다. 이후 1836년(헌종 2년) 75세에 사망할 때까지 많은 저서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2. 정약용의 인성론
李政幸(2002)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조선왕조가 내부적인 체제모순에 노출되어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관료와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정약용의 경학과 개혁서에 나타난 인성론을 중심으로 윤리적이며, 주체적인 인성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검토 연구하였다. 이정재는 천명(天命)의 성론(性論)에 뿌리를 둔 정약용 인성론의 실체를 규명하고, 수기(修己) 과정에서 인성이 어떻게 합리적이며 자율적 주체적인 실천윤리의 담당자로 변화하는가의 기제를 규명하고, 이 원리를 학제로서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다산 인성교육론이 함의한 현대적 의의를 드러내 보이려는 데에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중 심학(心學)을 다룬 경서로서 「중용」주석서, 「대학」주석서, 「맹자」주석서와 「심경밀험」 등을 기초자료로 사용하여 분석하고, 학제 구상의 원리에 대해서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일부 내용을 위주로 고찰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정약용 사상의 형이상학적 기저를 구성하는 상제천(上帝天)과 천도(天道)의 교육사상적 관계를 충분히 규명하지 못하고, 역사성이 내재한 세계질서 속에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인성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점이 연구의 한계라고 하였다.
李政幸의 논문에서 규명한 정약용의 인성론을 살펴보면,
정약용의 인성론은 천명(天命)의 성론(性論)에 기초하여 있으며, 천(天)이 부여한 성(性)을 기호(嗜好)의 성(性)으로 파악한 점을 중심으로 하였다. 기호(嗜好)의 성(性)을 부여한 천(天)은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으로서 만물을 주재하는 신격(神格)을 지닌 상제천(上帝天)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종래의 성리학자들과 달리 성(性),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을 자연현상의 일부로 경험의 세계에 포함시키는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유생(有生), 유각(有覺), 유영(有靈), 유선(有善)의 특성을 가지는 인간의 성(性)은 호선악악(好善惡惡)하는 기호(嗜好)의 성(性)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호선악악하는 기호의 인성은 가능성일 뿐이며, 실제에 있어서 형기(形氣)의 누(累) 때문에 난선역악(難善易惡)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마음은 택선택악(擇善擇惡)할 수 있는 마음의 권형(權衡), 즉 자주지권(自主之權)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인성이 천명의 본래의 선성(善性)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인간됨의 도리로써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호선악악하는 행위의 실천은 단순히 부끄러움만을 제거하여 떳떳한 경지가 아니라 이를 더욱 힘씀으로써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충만하여 그 신령스러움에 따라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경지에 머무를 수 있게 되는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환원하는 계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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