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포스트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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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포스트식민주의
1.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무엇인가라는 개념 규정과 관련하여 1989년에 영국에서 출판되어 포스트식민주의의 입문서이자 필독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제국의 되받아 쓰기 (The Empire Writes Back)』의 공동 저자인 빌 애쉬크로프트(Bill Ashcroft)의 정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포스트 콜로니얼”이란 용어를 식민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시기를 기점으로 독립 전/후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그 용어를 식민 전/후의 시기적 구분을 위한 용어가 아니라,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통칭적 개념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포스트식민주의가 전통적인 반(反)식민 저항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 이론이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 힘입어 서양 중심적으로 세계를 보는 휴머니즘과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역사가 발전되거나 모든 인류가 보편적인 인간성을 회복하였을 때 식민주의가 극복된다는 식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는 서구와 비서구의 존재 방식 자체이며, 이들의 대립 관계가 식민지 문제를 형성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포스트식민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지적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포스트식민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과 문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포스트식민주의는 서구의 지배를, “권력과 지식 사이의 불건전한 동맹의 징후”로 보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해방식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와 주체의 범주 자체를 문제시하는 데 비해서,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고, (주체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거부되고 소외된 주체성의 재확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갈라선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권력을 가진 “중심문화의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것인 반면에, 포스트식민주의는 소외되고 제외되어 온 “주변문화의 자기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이런 지배문화로서의 영문학에 대한 비판적 독해, 혹은 뒤집어 읽기를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영문학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독법과 분석을 통해서 텍스트 ‘다시읽기’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역사적 ‘맥락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분야에서 포스트식민주의 비평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알레고리, 아이러니, 메타포와 같은 비유적 표현을 재검토하면서 포스트식민주의의 담론적 실천의 시각으로 정전(canon) 텍스트들을 다시 읽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포스트식민주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특정적으로 생산해낸 효과를 찾아 읽는 흐름이다.
그러나 포스트식민주의 문학비평은 문학 텍스트를 넘어선 여러 방면의 식민적 상황을 분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을 확대시키고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즉, 포스트식민주의는 문학 작품을 넘어서서 철학, 정치학, 문화, 교육제도, 육체, 대중매체, 인류학 등 논의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식민주의의 작용과 이의 모순 그리고 극복을 논의하고 있다.
2.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 하얀 마스크를 쓴 검은 피부(Black Skin, White Masks)
해방된 식민지인들은 그날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되고 의식으로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진실로 자긍심을 가지고 홀로 설 수 있는가. 겉으로는 해방된 흑인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사에 백인이 되려고 애쓴다. 자신의 검은 피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여 꿈속에서는 늘 흑색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백인이 되고픈 소망을 무의식 속에 가두고 있다. 왜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는가. 해방이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몸의 해방일 뿐 마음은 여전히 갇혀 사는 식민지인은 아닌가. 식민지란 형태를 달리하여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이런 열등의식은 인간을 이중적으로 만든다. 하얀 마스크를 쓰는 검은 피부의 인간으로.
흑인 여성은 푸른 눈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여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 한다. 그녀는 영혼을 팔아 그의 시종이 된다. 흑인 남성은 어떤가. 흑백혼혈의 여성에게 아첨하고 그녀를 얻으려 한다.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신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피부색에 따라 한 단계 씩 상승한다. 흑에서 혼혈로 혼혈에서 백으로, 소망은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뿐 퇴행을 모른다. 흑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려 안간힘을 쓰다보니 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흔히 프랑스의 흑인은 미국의 흑인보다 더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만 프란츠 파농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의 흑인은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스스로 전리를 쟁취하려 행동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항의가 필요 없게 차별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 심어진 차별의식은 더 끈질기고 심각하다. 이 문제는 헤겔식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예의 피부 위에 주인의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으로는 주인이지만 무의식으로는 여전히 노예인 것이 식민시대가 끝난 탈식민주의 시대의 식민지인이다. 그래서 포스트식민주의의 포스트(post-)에는 후기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파농의 글은 이것을 밝힌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마스크들(Black Skin, White Masks, 1952)에서 속은 흑인인데 흰 마스크를 쓰려는 흑인들의 성격파탄을 이렇게 예로 든다. 흑인 여성은 같은 동족인 흑인 남성을 거부한다. 흑인 남성 의사는 군의관이 되어 자신이 당한 만큼 백인들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아를 사랑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지도 못한다. 굴욕감이 주는 자기학대는 타인학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화는 이처럼 제도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식민지 시대가 끝났다 해도 문화 속에 심어진 차별, 무의식에 내재된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식민주의는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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