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

 1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1
 2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2
 3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3
 4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4
 5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5
 6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6
 7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7
 8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8
 9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9
 10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10
 11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11
 12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1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 레포트 > 독후감
  • 2015.03.29
  • 12페이지 / hwp
  • 1,400원
  • 42원 (구매자료 3% 적립)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서평]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7~8장)-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 -북한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홍구 옮김
7장 강요된 행진
1956년 북한 내 공산주의 진영 간 파벌싸움이 극에 달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그 일파, 소련파와 연안파의 지도자들을 차례로 제거했으며 58년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을 숙청하였다. 라이벌들을 견제하는 데 성공한 김일성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위를 차지했지만 권력의 궁극적 원천인 군통제권에 대한 긴장은 조금도 놓지 않았다.
59년 김일성은 ‘일반 징집제’를 통해 제대한 8만명의 참전 용사 대신 ‘새로운 사회주의적 일꾼’이자 ‘남조선 해방의 역군’으로 키울 병사들을 충원했고 후방의 주민들에게는 ‘자급자족적 경제기반을 지닌 사회주의적 공업- 농업국’으로서의 발전을 강요했다. 50년 대의 북한은 극심한 곤궁기이던 남한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었으며 중-소 관계 등 국제 정치의 흐름도 급변하는 시기였다.
1953년 8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 이후 몇 달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당의 ‘강철같은 단결’을 강조했다.숙청과 전쟁 탈당으로 사라진 당원대신 새로운 당원들이 충원되고 훈련되었다. 당원들에게는 관료주의*형식주의에 대한 투쟁의식과 ‘침략자’에 대한 인민의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김일성은 ‘생산문화 수립’을 위한 경제*기술 분야의 유능한 간부들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직시했고 당 및 정부기관에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실무자 양성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당 사업을 잘 수행한 일꾼은 즉각적인 포상을, 뒤쳐진 일꾼은 신속한 책벌을 받았다. 55년 말에 이르러서는 사회 내 모든 요소를 가능한 한 포용한다는 ‘통일전선전술’에 의해 조선노동당원수가 1백만으로 급증했다. 당은 풍부한 군사경험을 가진 직업적 정치가들이 주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층에서는 ‘농민’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모든 공장,학교, 농장에는 말단까지 세밀하게 당 조직이 설치되었고 이를통해 ‘당 책임일꾼’들에 대한 훈련도 체계화되었다.
지방당 간부 즉 책임일꾼들은 여러 가지 압력을 받았다. 이들은 낭비와 탐오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서 벗어날 것과 함께 전후복구에 대한 눈에 띄는 성과를 강요받았다. 이는 지방 관료들의 실적 부풀리기를 유발하기도 했다. 한편 당에선 평범한 인민들이 행정당국자들을 비판하는 ‘독자투고제도’를 시행한다. 소련의 경험을 본 딴 것으로 북한 공산주의지도자들은 자아비판과 비판 전술을 대중통제의 무기로 본격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민들에게는 이른바 ‘자백운동’을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자백운동은 소련식 경제발전을 추진해 나가는 결핍의 시기에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유보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북안 내에서 거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이 사라졌다. 내부 투쟁에 의해 제거되거나 월남해 버린 것으로 북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최상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덕분에 북한 당국은 최하층 노동자조차 북에 살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정도로 남한의 실정을 마음대로 왜곡 선전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당의 영도 하에 제국주의 및 봉건세력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했고 ‘인민정권’이 확립될 수 있었다. 당 기본 정책과 조직 구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인민행동은 김일성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월남자와 그 가족에 대한 차별정책도 시행되었다. 북한 정권은 월남자의 가족들을 ‘심각한 해당행위를 한 자’‘전쟁 중 적의 선전에 속거나 끌려간 자’‘아무런 해당행위를 하지 않고 월남한 자’의 가족으로 세분화 해 식량배급과 교육, 취업 등에서 차별을 두었다. ‘출신 성분’ 차별책은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계급투쟁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당시 지식인에 대한 당의 태도는 국내외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53년 박헌영과 그 일파에 대한 숙청으로 ‘국내파’는 소멸하다시피 했고 정치 엘리트 간 위계질서에도 변화가 생겼다. 연안파의 원로 김두봉이 공식적인 북한 서열 2위로 자리매김했고 박창옥,김일 등 연안파와 소련파 인물등이 중용되었다. 그러나 당과 정부에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한 인물은 김일성과 박정애,최용건,김일,박금철로 이들은 모두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에 몸담거나 후에 합류한 이들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무너진 지방 당 조직재건이 정치*경제 복구의 선행 요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54년 10월 31에는 새로운 지방주권기관 구성법이 공포되었으며 56년까지 각급 지방당과 주권기관 대의원 선거가 집중되었다. 57년 들어 당은 현지 지도원을 파견하여 당총회,학습회 등 각종 모임을 주최하는 등 ‘현지 집중 지도’에 공을 들였다. 당 간부들은 당원 교화*통제의 수단으로 수시로 당원 개개인을 심사하며 부적격자를 출당시키는 ‘당증 재교부사업’을벌였고 일반 인민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그 가운데 ‘새로운 도덕’이 강조되었는데 그 내용은 ‘친절,공공재산 애호, 애국심 등 이며 ’개인 영웅주의,리기주의, 자기본위주의 등‘ 단체 행동과 생활을 해치는 행동들은 ’낡은 도덕‘으로 규정,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전쟁의 여파로 북한의 많은 군소 정당들이 사라졌다. 50년대 중반 살아남은 것은 조선 노동당 이외에 ‘조선민주당’과 ‘천도교 청우당’ 두 정당뿐이었다. 당 최고 간부들은 ‘통일전선활동 강화’의 일환으로 이 두 정당을 활용했다. 비공산주의 정당을 용인함으로써 북한 정권이 통일전선에 의거한 정권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도록 했으며 남한 내 지지자를 획득하는 방편으로도 이용했다. 만일 통일선거가 실시될 경우 이들의 표를 끌어 모은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1946년 조만식의 숙청은 두 정당을 비롯한 북한 내 군소정당들의 실질적인 존립 기반을 끊어 놓았으며 한국 전쟁 기간 중 혹은 그 후에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 등으로 차차 소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