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산책 타나토노트를 읽고 -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죽음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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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타나토노트를 읽고 -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죽음에 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철 학 산 책
타나토노트를 읽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죽음에 대한 고찰
아침에 뉴스를 켜거나 신문을 보면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사건에 의해 누군가가 죽었다는 기사를 거의 매일 접하게 된다. 우리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있는 이 시간에도 어딘가 에서누군가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이상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공간에서의 누군가의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 결국 누군가에게 죽음은 나와 관계된 사람의 죽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죽음은 무엇일까? 이런 진부한 물음에 대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현세와의 분리, 이별이라고 정의내리고 누군가는 또 다른 세계에서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가 겪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가 죽음에 대해 정의를 내린고 단정 짓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죽음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더불어 죽음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대해 나름의 사유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신의 작품 타나토노트(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Thanatos와 항해자를 뜻하는 nautes를 합성)를 통해 사후세계에 대해 상상력을 펼쳤다. 이 작품에서는 2060년대에 이르러 인류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어 사후세계, 즉 영계를 방문했다가 다시 육신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는 방법을 알아내게 된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영계를 탐험하는 사람들을 “타나토노트”라고 부르며 시도를 거듭함에 따라 영계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과 천국을 차지하려는 각 종교 간의 전투, 그리고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었던 종교간 화합의 장면에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바처럼 죽음은 모든 이들의 관심사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특히 인간사에 있어서 죽음은 개개인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문화와 접목하여 형상화 되었다. 종교는 인류에 역사와 함께 시작하여 함께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이러한 종교는 인간이 불안하고 병약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할 때 비로소 진가가 발휘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불안하고 심약할 때 종교를 찾게 되는 것일까? 그 답은 종교 속에서 죽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다. 많은 종교에서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육체적 부활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아후라 마츠다가 이 세상을 지배할 궁극적인 역사의 종말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사후 세계를 명시하며 자신들과 함께한다면 영원한 세계, 즉 죽은 뒤에 파라다이스를 약속하여 불안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평안과 안녕을 심어준다. 즉 종교는 죽은 뒤에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많은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죽음은 인간과 땔 수 없는 현상이다. 누구나 태어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처럼 이러한 두려움은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자연스럽게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첫 째 자신의 관계를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과의 분리, 그리고 사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다.
죽음은 현세에 있어서 관계되었던 모든 것과의 분리를 의미한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현세와의 분리, 가족, 지인들과의 이별, 아버지, 어머니, 남편, 친구, 상사, 선배 등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역할의 상실 등 모든 것이 유에서 무가 되는 것이다. 특히나 죽음에 의한 분리는 영원한 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상실감이 더해진다. 다시는 그 사람과 같이 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사람과의 추억들을 기억으로만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크나 큰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사전에서 상실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혹은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거나 잃어버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유를 의미한다. 정리해보면 상실은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결국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그에 대해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뜻하게 된다. 소유욕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소유했던 것을 잃게 되기 때문에 누군가와 좀 더 많은 것(그 사람과의 추억, 감정, 소중함 등)을 소유하고 있을수록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상실감에 크기가 가감된다고 말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화장보다는 무덤을 만들어 찾아갈 수 있게 만드는 문화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고 가까이 두고 싶어서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유에 상실감은 산 사람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누군가는 죽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과 분리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은 산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게 된다. 사실 죽은 사람은 그 뒤에 어떤 일 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슬픔과 두려움은 산 사람들의 몫이고 그들에 의해 죽은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얼마나 슬픈지, 마음이 아픈지는 산 사람들 사이의 사건이다. 죽은 사람이 죽은 뒤에 고통이 계속 남아 있을지, 땅속에 파묻혀서 외롭고 답답할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산 사람들에 의한 막연한 상상이고 두려움일 뿐 인 것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고통보다도 본인들이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느꼈던 슬픔과 고통, 상실감에 의해 정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면서 행하는 장례식에 경우에도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아닌 산 사람들이 그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느끼는 슬픔과 상실감을 덜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와 분리되면서 느끼는 상실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두 번째 이유는 사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다. 인간의 상상속의 사후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그곳을 관장하는 이들도 다르고 그 곳에 환경, 그리고 현세에 있을 때에 따라서 가게 되는 곳도 다양하다. 이처럼 다양한 사후세계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사후세계를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를 갈 수 없고, 선한 곳과 악한 곳 두 가지로 나누어 현세에 선한 곳을 갈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춤에 의해 선한 곳을 갈 수 있음을 한정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살펴보았을 때 알 수 없는 사후세계를 형상화하여 현세의 행동에 제약을 가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후세계의 유무와 형태는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였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타나토노트 에서처럼 인간이 사후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덜하게 될 것이다. 사후세계가 우리의 상상처럼 두가지 형태로 존재함을 확인한다면 그리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조건을 알 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지금과 다르게 될 것이며 그 필요조건을 행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할 것이다. 당연히 죽음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 저편에 있는 세계에 대해 알 지 못한다. 죽고 난 후 더 괴로울지, 땅속에 있으면 답답할지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죽음 저편에 있는 세계에 대한 탐험은 다른 어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는 달리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인간의 유한성에서 무한(전체성)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것 즉 죽음을 통해 인간은 본인의 유한성을 현존재의 의미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모든 존재는 죽음을 직면하게 되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고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 고찰을 한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존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관해 확실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확실해진다. 바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나를 기억해주고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대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물론 죽고 난 뒤에 망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죽은 자에게 소중했던 사람 혹은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 혹은 의미 있는 사람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과 일치한다고 할 순 없지만 자신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현세에 있어 타인을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본인의 죽음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누군가로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 설정된다. 타인이 없는 본인은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다. 나를 관계 짓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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