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시간 존재와 시간 줄거리 존재와 시간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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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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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존재와 시간
작가
1976년 5월 26일 마르틴 하이데거가 별세하자 독일 중부지방의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 Allgemeine Zeitung) 은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이 사람 마르틴 하이데거 안에 세계 철학사의 모든 지혜가 집결되어 있으며, 그가 남겨놓고 간 어마어마한 작품은 그의 독자들을, 지금까지 어느 다른 철학 문헌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깊이 물음의 심연에로 휘몰아 넣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하이데거를 나치추종자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1987년 프랑스에서 출간 된 빅토르 파리아스의 책 {하이데거와 나치}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본 온 프랑스는 경악하였고, 어느 유력 일간지는 "하일 하이데거!"(Heil Heidegger!) 라는 제목아래 이 "사건"을 다룰 정도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독자들을 실망시킬만한 사건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현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적으로 지성인들의 존경을 받는 철학자였으며,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였다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 9월 26일 바덴 주, 주민 4천 가량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농부집안 출신 어머니 요한나 하이데거와 성당지기 일을 하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데거 사이에서 태어난다. 여섯 살이 되어 하이데거는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그의 총명함은 빛을 발하지만 성당지기인 아버지의 힘으로는 하이데거를 계속 공부 시킬 형편이 못되었다. 이를 본 메스키르히 본당 주임신부는 장학금을 주선해주었고, 하이데거는 신부가 된다는 약속을 하고 콘스탄츠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그리고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가게된다. 1903년에서 1909년까지 6년간의 김나지움과정을 마친 뒤, 하이데거는 약속대로 신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위해 포알베르크(Voralberg)의 펠트키르히(Feldkirch)에 있는 예수회에 수련생으로 입회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하이데거는 예수회의 학자신부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일반신부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지만 건강이 또한번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렇게 2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1911년 하이데거는 이제 오로지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다.(김나지움 시절, 하이데거는 많은 철학책을 즐겨 탐독하였다)
1913년 하이데거는 「심리학주의에 있어서 판단에 관한 학설」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한다. 2년 뒤 리케르트의 지도아래 교수임용자격논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완성한다. 이 논문에서 하이데거는 신칸트학파와 후설의 범주론의 도움을 받아, "일반 의미론"에 관한 중세 철학의 이념을 다시 복원시켜 보려고 시도한다.
1919년 그는 사강사가 됨과 동시에, 1916년 괴팅겐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초빙되어 온 후설의 연구조교가 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행한 "초월론적 현상학"에로의 전환을 뒤따르지 않고 후설의 「논리 연구」의 여섯 번째 연구를 계속 거듭하여 근원적으로 해석하였다. 동시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데에도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한다. 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이데거는 그가 전수받은 가톨릭 신앙과 논쟁적인 대결을 벌린다.
1923년 겨울학기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부교수로 초빙되어 간다. 그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는 나토릅(P. Natorp)과 하르트만(N. Hartmann)이 강의를 주고 있었고, 곧 하이데거와 친구 사이가 된 불트만(R. Bultmann)도 있었다.
1927년 후설이 편집하고 있는 잡지「철학 및 현상학 탐구 년보 제 8집의 별책부록으로 「존재와 시간」 제일부가 출간된다.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 책에서 하나의 거대한 체계적인 연구 작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는 대체로 인식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그 작품을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 노선의 실존철학의 하나라고 보았고, 어떤 사람은 칸트와 피히테 식 단초의 변형으로 보기도 했다. 그 저서가 "존경과 우정으로" 헌정된 당사자인 후설은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자기 후임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겨울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만 1928년 겨울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초빙을 받아들여 후설의 후임으로 오게 된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수취임강연을 시작으로 조용한 학문연구의 시절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평온한 탐구와 교수의 일상생활은 하이데거가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이 되어, 제삼 제국 총통의 원칙에 따라 대학교를 새로 조직하라는 임무가 부여될 때 깨지고 만다.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총장취임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지식의 임무"를 "노동의 임무"와 "방어의 임무"와의 단일성에서부터 파악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오 직 이 지식의 임무만이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재에 "날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밖의 공적인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국가사회주의적으로 들리는 입장들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틀러 나치당의 극단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토착(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민족"을 외치고 독일인 고유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핵심적인 역할에의 용기를 부르짖는 국가 사회주의적 운동에서 아마도 하이데거는 그가 희망해온 새로운 시작을 추정한 듯 싶다. 여기에 또한 대다수의 많은 다른 대학교수들처럼 하이데거도 전문 정치 경제적 상황분석에 대한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 또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당 정책에 대한 이견과 바덴주 문화성과의 불화로 취임 1년 뒤인 1934년 2월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이데거는 거의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의 제 2부도 (오늘날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다. 몇 개의 소책자만이 발간될 뿐이다. 그중 하나는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학설」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이다. 그 외에도 횔덜린의 시에 대한 해설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