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 나서 - 종교, 다문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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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을 읽고나서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상당히 의아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다문화 세계로 나아가고, 그런 만큼 여러 인구와 교류하는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민족이 재일한국인으로,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창가학회’라는 말은 아예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책의 여는 글에서 창가학회라는 말을 다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불교뿌리에서 나온 신종교라고 한다. 나는 기독교라서 불교를 잘 알지 못했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가족 모두도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들은 중, 고등학교 시절에 사회 과목을 공부하면서 이론만 조금 익혀뒀던 정도일 뿐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왜 재일한국인들이 창가학회라는 신 불교를 믿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글을 잘 알지 못했었고, 그래서 경전 중심으로 되어 있는 불교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닿지 않는 일종의 지배 계급만이 존재했던 세계였던 것 같다. 또한 석가모니가 주장했었던 평등이라는 기존의 불교의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고 내세를 위해서 단순히 염불만 외웠었다고 한다. 창가학회를 이끌었던 니치렌 이라는 승려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교 경전의 해석법을 토대로 이 신흥종교를 전파했다. 일본불교가 대중 불교로 발전하게 만든 것도 생각해보면 이 승려 덕분이 아닌가하고 느꼈다.
책을 읽다보니, 새삼스럽게 ‘재일한국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재일한국인을 일제강점기 시대에 강제로 징용되거나 끌려갔던 사람들이 일부 남아있는 것이 이제까지 내려온 것을 재일한국인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경제 문제라던가 당시 제주도의 상황 등을 생각해 본다면 자의로 남은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생각 외로 복잡한 문제들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재일한국인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나 민족 자체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일본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다. 독도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얽혀있기 때문에 일본인이 바라보는 한국인에 대한 시선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과거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껴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가학회는 일종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전쟁 패망으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고, 대한민국과 북조선 정부수립으로 국적이 허공에 뜬 채로 버림받은 사람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내에서도 억압과 차별을 겪어야 하는 시기에 재일조선인 일부가 만난 종교가 창가학회였다고 한다. 창가학회가 내걸고 있는 것은 바로 평등과 평화. 수많은 억압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던 도중에 만난 창가학회는 국적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사람들임을 강조하며 재일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지난 고교시절에 배웠던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떠올렸다. 당시에 수많은 불평등과 억압에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신흥종교인 동학은 하늘 아래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것의 신도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창가학회는 다른 종교들과는 다르게 ‘내세’에 중점을 두었다. 현재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패망 이후 어렵고 가난한 삶을 보낸 이들에게 현재의 행복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종교도 일종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종교가 만들어졌을 당시의 배경이나 민심 같은 것이 그 종교를 크게 만드는 것에 일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고3 시절에 한창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가며 교회에 나서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가 하셨던 말이 있었다. 마음이 불안한 시기에는 그러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그런 수단 중에 하나가 기도라고 했던 말이었다. 아무 곳에도 기댈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에는 무형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기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했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마 아빠가 했던 말씀들은 신심을 이용한 플라세보 효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가학회도 이러한 신심을 강조했다. 불교의 나무아비타불에 해당하는 ‘남묘호렌게쿄’를 읊조리도록 하면서 그에 따라 신심을 쌓고 수양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남묘호렌게쿄를 읊조리며 경건하게 수양한 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기도 했다. 수능이 끝난 시점에 가채점을 하면서 나온 성적에 대해서 노력의 결과일거라고도 생각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것과 반면에 내가 열심히 기도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성적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비슷한 사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 개인의 신실한 의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만드는 어떠한 심리적인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