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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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상문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리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리뷰
"함께 있을 때면 매 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는 책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말이다. 오늘을 잊지 말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 두 대사는 활자 상으로든 실제 소설 속 상황에서든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사임과 동시에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타이틀 이기도 하다. 이 말이 무엇이기에 작가는 그리도 많이 명서의 입을 빌어 이 말을 했던 것 일까. 윤, 명서, 단이와 미루는 오늘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했었지만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한쪽에서만 울메아리치던 내가 그쪽으로 갈게의 부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말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 일까.
이 소설은 암울한 시대 속에서 윤, 명서, 단 과 미루가 사랑하고 아파하고 , 상실하는 과정을 담은 청춘 소설이다. 윤과 단은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자란 친구다. 하지만 어머니가 당신이 아프다는 걸 안 뒤에 윤을 서울 사촌언니에게 보낸다. 엄마가 아픈 것에 얽매이면 윤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윤은 엄마에게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새로운 곳에서 창에 검은 도화지를 붙이고 세상과 단절한 채 지낸다. 그 도시에서 처음 산 말테의 수기에서와 같이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간다고 생각될 뿐이다. 라는 구절은 당시 윤의 상태를 대변한다. 그리고 윤이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윤은 대학생활에 더욱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계를 내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소읍에서 아버지와 둘이서 일년을 말없이 지내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남쪽도시에 있는 대학을 간 단이가 집에 들르러 오면서 둘은 재회를 하게 되고, 윤이는 어머니의 묘소에서 한줌의 흙을 주머니에 담아 온 뒤 대학에 복학하게 된다. 윤은 복학한 뒤 들은 첫 강의로 윤교수의 수업을 듣게 되고, 그 인상적인 수업에서 명서와 마루를 만나고 서로 강력한 끌림을 느낀다. 그들은 곧 그들의 아픔을 공유해나가며 친해진다. 그러던 중 단이 입대를 하게 되고 윤과 단은 편지를 주고 받고 면회를 오가지만 마지막 면회를 다녀온 뒤 단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한 채 자살인지 실수에 의한 타살인지 알 수 없는 단이의 의문사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쯤 분신자살 한 미래언니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살던 미루도 연락 두절이 되는데, 결국에 미루는 할머니의 빈집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미루의 부모님이 미래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팔아버리자, 다시 거식증을 앓게 되었었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 이후에 명서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윤에게 우리는 함께 하면 흉해질 거라면서 남은 그 둘 마저 점점 멀어져 간다.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무지 누구 하나 시원하게 뭐가 어떻다 말해주는 이가 없다. 스토리의 구성자체도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풀어나가다가 일들의 진상은 나중에서야 이러이러했단다. 하고는 말아버린다. 하지만 그것조차 작가도 모르는 듯, 카더라 식으로 마무리 되는 게 영 찜찜하다. 이것을 통해 이 소설은 총체적으로 소통의 부재란 문제의식을 작품 전반에 드리우고 있다. 마루네 고양이 에밀리, 소설전반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 조차 은둔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암울한 시대상황, 함부로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없던, 독재정권의 시대에서 의식 있는 젊은이 들의 외침은 계속되었지만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정부와 시민의 대화가 단절된, 아예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서 그들은 살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나부터 독립적이고 당당하길 바란다. 숨김이 없고 비밀이 없으며 비난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원한다." 책에서 명서의 갈색노트에 나오는 부분이다. 소통의 부재의 악순환에 대하여 명서는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도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만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짐은 약간은 처절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명서는 소통하기 위해 항상 내가 거기로 갈까. 라고 끊임없이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소통을 하고 아픔을 나눈 시절을 가졌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말인가. 우리가 함께 있었을 때 그는 수화기 저편에서 늘 이 말을 하고 있었지. 내.가.그.쪽.으.로.갈.까.? 그때의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또 이런 말도 했었다. 그.쪽.으.로.가.고.있.다,고.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흐린 날도 맑은 날도 그 말 속에 섞여 흘러 갔다. 그때의 우리는 어느 시간이든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이른 시간이어도 그가 내게 오지 못하는 시간은 없었고 내가 그에게 갈 수 있는 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우리는 언제든 서로를 향해 어서 와, 라고 말했다." 결국 “내가 그쪽으로 갈까, 가고 있다, 갈게.”는 소통을 의미한다. 언제든 손을 내밀고 다가가고 기댈 수 있는, 열린 소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어쓰기를 하던 행위 또한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소통이다. 하지만 그들이 치유되는 듯 보였던 그들의 아픔이 다시 한번 장벽에 부딪히면서 그들은 소통하기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결국 그들의 소통은 끝이 나고 그들의 관계도, 삶마저 끝이 난다. 그를 찾아 떠났던 미래언니가 죽기 전에 연락을 끊었고, 미루가 그랬고, 단이는 윤이 답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단절되었었다. 결국 그들의 소통이 무너지면서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남은 이들의 소통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그때의 그들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소통은 어떤가. 작품의 시대는 80년대 같기도 90년대 같기도 하다. 정확한 명시는 없지만 시대배경으로 으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년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작가의 뜻처럼 느껴졌다. 현대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민주주의 사회다. 게다가 급격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에 정치인, 유명인들과 어느 정도 직접적인 소통도 가능한 시대다. 말 그대로 소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논란과 부작용은 그것이 허울만 그럴 듯 한 것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윤과 명서의 시대가 소통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지금은 자유로운 소통의 활로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인지하고 그런 의미의 소통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아니고서는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로서 크리스토프든 그 등에 업인 아이이든 간에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건너야만 한다. 그것은 소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보여주기 식의, 솔직하고 투명하지 못한 소통은 지금 난무하는 독설과 비난의 소통이 되어버릴 것이다. 소통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한 해결책과 전달을 위한 수단이지 소통을 위한 소통은 그 진의를 잃어버린다. 올해 어느 스포츠아나운서가 자살을 했다. 그녀의 자살은 물론 그녀의 책임이기도, 그녀와 관계된 스포츠선수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소통이 불러온 참혹이다. 그 일의 시작, 진행, 결과가 모두 SNS를 잘못 사용하고 오해한 그녀와 대중들 때문이었기에 그러하다.
나는 지금 청춘이다. 나 또한 사랑하고 고민하고 상실한다. 그 때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언제든 서로를 향해 어서 와. 라고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뿐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 소통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도 손을 내밀기 쉽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사회 속에서, 개인 간에 소통의 부재는 모든 것의 부재와 연관되어 있다. 거식증이 걸린 미루의 음식일기처럼 상실되는 것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오히려 더 감시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소한 이 책을 읽은 이들만은 진짜 소통을 향해, 내가 거기로 갈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 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