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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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을 읽고
일본교회가 신도 군국주의 일본 당국에게 점진적으로 타협을 하다가 결국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다는 음울한 역사를 보았다. 일본과 한국에는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적은 수이지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변절하지 않은 신실한 무리들은 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일본 당국과 적대적인 타종교에 야합하고 타협하여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게 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 비해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신사참배 등에 끝까지 저항한 자는 극소수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한국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던 해인 1945년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게 되었고, 한국교회 역시 기독교와 신도 국수적 민족주의와의 충돌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일본교회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바, 그 이유는 한국이 일본 제국 식민지로 전락하여, 일본의 정치적인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민족 감정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한국교회는 보다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적 현상으로 더 격렬한 저항을 감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일본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박해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 사실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와 동일하게 신사참배에 대해 단합된 자세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야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336-337) 참된 기독교 신앙은 말씀, 즉 성육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가운데서 자신의 생을 영위하는 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 가운데 존재한다. 신사참배의 목적은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천황숭배를 통해 일본정신을 그 정신에 고착화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행위는 명백하게 애국적인 행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반역적인 사건이 되었다.(338-339) 경찰과 형사들은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직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가 존중의 행위라는 점을 열심히 기독교인들에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설득이 별 다른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되자, 결국 신사참배가 실제적으로 예배행위임을 자인한 후에, 선교회들을 설득시켜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에 참가할 것을 강권하게 되었다. 선교회는 당대 다수 일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찬동 분위기와는 달리 결코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일반 일본 신자들은 이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지 말자. 그리하여 사서 하는 고생과 난관에서 벗어나자.” 그러나 미노 선교회는 대다수의 일본 교계와 교단과는 정 반대의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용감한 저항이었고, 천황주의 신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목숨을 건 순교자적 행위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야훼 유일신 사상을 신봉하는 기독교 신앙의 산 증인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다른 자들에 의해 소수자로 여겨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은 승리의 면류관을 써도 마땅한 참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도 바알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던 소수의 거룩한 자들이 일본 교회 역사를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교회주의 기독교 그룹도 일본 군국주의 국수 민족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저항은 무교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우치무라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자극되고 형성되었다. 야나이하라는 우치무라의 직계 제자로서 토쿄 제국 대학교의 교수였는데, 기독교계의 탁월한 신학자로서 사탄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역설하였다. 또 민족과 평화라는 책을 통해 일본이 국제관계에 있어서 신뢰성과 민족적 양심을 가질 것을 역설하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연설을 통해 자국의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남바라 역시 국가와 종교라는 책을 써서 민족주의에 대해 건전한 비판을 시도했다. 카가와는 기독교 사회복음 운동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기독교 사회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성결교회였다. 중생, 성화, 신적 치유, 그리스도의 재림 등. 애국노동 봉사라는 명목으로 군수물자 공장에 보내어져 사역을 해야만 했다. 수가노, 사이토, 타케이리 같은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순교하였다. 기독교 소수 집단에 의해 제시되었던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단순한 증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적합한 증거였다. 그들은 비록 소수의 무리로서 지상에서는 고통을 받지만, 빛나는 금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반짝이는 새벽별이 될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 저항과 박해 개신교 선교회는 1884년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중국보다는 50년후에, 일본보다는 25년 후의 일이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이 한국과 더 일찍 접촉하게 되었다. 구츨라프 목사는 1832년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을 방문했던 인물로 짐작된다. 그는 조선에 약 40일간 머물면서 중국어로 된 소책자 성경을 조선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354-355) 대략 30년 후인 1866년에 조선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곧 토마스 목사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 있던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로스, 매킨타이어는 네 명의 젊은 조선 청년 상인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을 시행하기도 전에, 성경 번역이라고 하는 과업이 이미 잘 준비되어 있었다. 로스에 의해 회개를 했던 자들 중 한 명이었던 서상윤은 복음전도 사역을 시작했고, 나중에 그는 조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 이수정은 일본을 방문했다가 요코하마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에 의해 회심하게 되어 복음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마가복음이 1884년에 인쇄되었고, 이와 때를 맞추어 우연의 일치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으로 향하는 도중에 조선어로 기록된 마가복음서를 지참할 수가 있게 되었다.(356-357) 1884년부터 다양한 선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 속속 한국에 들어왔고, 그들의 선교 영역은 의료, 교육 등의 사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들의 노력 가운데서 선교 경험을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새로운 선교사역 시스템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1890년 이후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네비우스 선교정책’이었다. 그 선교정책에 따라 토착민 전도자에게 급료를 지불하면서 전도하던 옛 방식을 버리고, 선교 시초부터 토착적이고도 공격적인 전도방식을 수행하는 원주민 교회를 설립하는 새로운 선교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설립되었고, 한국교회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토착적 성격이었으며, 이는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의 근원인 동시에, 비록 다른 결점과 나약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큰 장점이 되었다.(358-359)
초기 선교사들은 요리문답 교육을 강조했다. 모든 새신자들은 6개월 동안의 학습기간을 거쳐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였고, 이를 통해 입교인이 될 수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학습교인’이라는 명칭을 지니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학습 기간 동안의 신자들’을 의미했다.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가 소수인데 반해, 성경연구 네트워크와 성경연구 모임, 성경교사 훈련 모임 등은 한국교회 자립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359) 다양한 교파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던 초기 선교사들은 서로 에큐메니칼적이고 협력적인 선교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교파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 선교에 있어서 교파주의의 폐단과 해악이 이미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를 채택하여 하나의 교리와 정치체제 하에서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2년에 그러한 시도와 발맞추어 평양에 미국 장로교회 소속 마펫 선교사(Rev. Samuel A. Moffett, 1890-1935년 사이에 조선에 거주함)에 의해 장로회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장로회 공회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네 장로교 선교회에 소속된 학생들에게 그 입학이 개방되어 있었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어 그들은 최초로 190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조선의 첫 목사들이 되었다. 그들이 바로 조선 장로회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확장되어서 1912년에 조선 장로회 총회가 되었던 것이다. 1933년의 통계를 따르면, 조선의 가톨릭교도가 12만 6천명이었고, 개신교인은 39만 8천명이 되었다. 그 중에 무려 장로교인만도 28만 4천명이나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와 조선장로교 총회(1938)
한국교회 역시 교회 역사상에 있어서 박해와 고통의 국면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의 상태보다 더욱 압제적이고 심각했다. 기독교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던 저항과 관련하여 평안남도의 복지국은 Jinja Fusampai Mondai ni Tsuite(신사참배 참여를 거부함에 관하여)라는 제명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에는 신사는 천황 가문의 조상들과 영웅들이 안치되어 있는 공공시설에 불과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을 따르면, 훌륭하고 선량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해야 하였다. 기독교 목사와 평신도들은 모두 신사참배에 관한 반대 의견을 내기만 해도 투옥되었고, 그런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남장로교 선교회가 신사참배에 참여하느니 교육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한 반면, 북장로교 선교회는 최종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소수의 선교사들과 현대주의의 영향을 입은 뉴욕 선교부가 신사참배가 단순한 의식인지 아니면 우상숭배인지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리교회 선교회는 신사참배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애국의식이라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보증을 구실로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의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전환점이 1938년에 개최된 장로회 총회에서 도래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감리교 감독주교는 이미 신사에 절을 한 상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