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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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겠는가? 자네 말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도록? 맙소사! 책을 읽어 행복할 수 있다면 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책이라면 아쉬운 대로 우리 자신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해주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놀라움과 함께 침묵이 동반되는 일이다. 어떤 책들은 우리가 그저 그것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기를 종용한다. 카프카가 폴락에게 썼던 저 편지처럼, 니체 역시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를 정오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정오란 오전이거나 또는 오후이지 않다. 그것은 오전이면서 동시에 오후인 시간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둘로 나눠지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그 모서리에서는 두 대립항들 사이의 이원성이 공존하며, 그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관점들이 하나의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관점들의 증식의 조건이자 원동력인 그 이접의 형식들을 생산한다. 니체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모두를 비판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온 절대주의는 실재와 표상들 간의 초월적 기표일치, 초감성적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고 반대로 수동적인 상대주의는 실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절대주의는 그 근엄한 목소리로 피의 재판을 벌이는 사제들을 생산하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삶을 허무와 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에 빠뜨려버린다 ‘모든 것은 거짓이다.’ 니체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 이것이 니체란 정오의 모습이다. 니체의 광학으로 바라본 세계엔 진리란 하나가 아닌 여럿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인가? 가 아니라 이미 여럿인 진리끼리의 투쟁의 양상 자체이다. 그곳에는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실현하는 명령인 힘의 의지 Wille zur Macht의 주체들이 서로 화약성 없는 전쟁을 수행하고 그 충돌의 관계들에 의해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는 그렇게 삶의 생리학을 주장한다.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것이다. 우선 그는 그렇게 스스로 학자이기보단 의사가 되기를 의지한다. 그는 그를 읽는 모든 이들에게 정신과 영수증을 들이민다. "당신은 군주가 되어서도,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선한 자가 되지 말고 강한 자가 되어라. 귀족, 거인, 어린아이, 그리고 또 다른 니체씨가 되어라!" 그것이 니체의 놀라움이다.
그의 광학을 통해서, 이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니체라는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그 표면의 질감이다. 앵포르멜 회화에서 표현의 제스쳐보다 표면의 마티에르가 중시되는 것처럼, 그에게서도 의미보다 그 질감이 중요해진다. 니체의 참된 가치는 그가 말을 통해 하는 예언들과 진단에 있지 않다. 이제 그것 역시 하나의 의지-진리에 불과하다. 그 니체의 의지에 힘을 부과해 주는 것은 니체의 행위 속에 있다. 알랭 바디우는 행위는 극복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이것은 절대적 깨짐이고, 그것의 고유명은 니체라고 말한다. 니체에게 해석은 병의 진단이 아니라 창조와 생성의 문제, 곧 행위 그 자체이다. 그는 해석으로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그만의 뉘앙스, 스타일에 의해 드러난다. 시와 드라마, 서평, 에세이 , 논문 등 다양한 미적 형식을 통해 그는 계속해 자신의 질감을 달리한다. 그럼으로 니체라는 모서리에서는 니체조차도 하나이지 않다. 여기엔 무수히 많은 니체씨들이 있다. 디오니소스이면서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the Crucified, 방랑자, 다이너마이트이자 광대, 차라투스트라, 하나의 스타일이자, 하나의 뉘앙스인 니체씨들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그 각도에 따라 기적과도 같이 세상이 다른 모습을 띠고 보이는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다른 유리로 다른 세상을 본다. 그는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현재에 변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먼 미래에 둔다. 니체는 그렇게 계속 변화하며 고정되지 않은 채 생의 역동적 힘을 찾아 끊임없이 행위하며 유랑한다. 차라투스트라조차도 초인 Ubermensch이 아니었단 사실은 주지하는 바가 크다.(그 역시 단지 초인의 도래를 알리는 선지자에 지나지 않았다.) 초인이란 하나의 결정된 삶의 태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극복의 의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니체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오히려 니체적이라는 하나의 형용사에 가깝다. 니체는 스스로 매우 니체적이다.
니체를 읽을수록 나는 그가 아기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갓난애는 오직 그 강렬한 생의 본능으로 인해 지독히도 이기적이어서, 때로는 그것이 광기로조차 보이기도 한다. 아기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어떻게 이 아기를 달래줘야만 하는 것일까? 먼저 그 아기가 우는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아기의 첫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그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머무르기 전에 이미 행해진 것이다. 하나의 난자를 향한, 그 수많은 정자들의 레이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첫 행위이고 첫 승리이자 그 결과로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그 완벽한 세계를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었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승리의 기억이며, 니체라는 아기가 그리워하는 장소이다. 니체가 언제나 말하곤 하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란 그것의 상징계인 것으로, 그는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는 개체로써의 승리로 얻어졌던 그 완벽한 세계가 미치도록 그리워 ‘승리할 것’ 외치며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개체로써의 진화라고 한다면, 그 진화는 생물이 살아남기 위하여 점진적으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켰다고 하는 다윈의 진화론보다는 생물이 스스로의 의지로 어느 날 진화를 선택하였다는 어느 기괴한 가설-굴드의 단속평형설-과 더 닮아 있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보라기 보다는 이러한 진화이다. 그에게 진보란 도구적 이성으로 최후의 인간들만이 독점하게 되는 것이고, 의지에 의한 진화란 그곳에서 강자들이 선택해야만 하는 바이다. 진보를 도구적 이성에 의해 행하지는 것으로 본다면, 진화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오히려 행동하지 않음에 더 가깝다. 니체의 진화는 행동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아이는 큰 소리로 울고 있다. 그것은 마치 침묵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다.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진정한 침묵이란 침묵 자체를 중단시킬 수 있는 공백이다. 니체의 침묵은 바로 이것이다. 침묵이라는 것이 우리가 앎의 순간-아폴론적인 것에 동반되는 행동하지 않음이라면, 니체의 진정한 침묵은 그 이후 도취의 순간-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동반되는 행동함이다. 진화는 개체로써의 정자들의 독립된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순간은 침묵, 즉 행위와 함께해야만 한다. 그것이 니체의 침묵이다. 니체를 아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니체가 되는 것은 어렵다. 니체가 되는 것은, 우선 놀라움이 동반되는 앎을 전제하고, 이후 침묵이 동반되는 행위가 따라야만 한다. 그리고 니체를 읽는 이들은 니체가 되어야만, 이 아기를 달래줄 수 있다.
이러한 니체를 달래주는 이들, 즉 니체적인 이들, 또 다른 니체씨들이 있다. 이 니체의 아포리즘들에 쏘아진 이들은,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는 니체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해석을 소유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생성의 문제로 받아들인 자들이다. 니체는 오직 이들과만 스캔들을 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샤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말한 바 있는 인간에겐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니체의 불경한 외침, 신은 죽었다!와 맞닿아 있다. 이 실존주의자들은 니체를 계승하고 신이 죽은 세계의 자유의 방향성으로 문제의식을 달리한다. 이들이 니체를 행위하는 자들, 즉 니체적인 이들이다. 반면 알랭 바디우 등의 수정된 본질주의자들은 신-본질이 있음을 주장하나, 신은 이미 죽었지만 인간주체의 믿음을 통해 다시 충실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니체를 새롭게 해석하는 사람, 니체가 놀랄만한 니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니체적인 이들이다. 또한 똑같은 주체동질성의 허구에서 시작했음에도 개인의 개체성을 구제하기 위한 모험을 했던 니체와는 달리 아우슈비츠라는 실존적인 절망을 경험하고 고통에 대한 연민과 불행한 의식, 몰락의 느낌 속에 자신을 내맡긴 체 실천의 거부를 선택한 모더니스트 아도르노 역시도 또 다른 니체적인 이다. 더 나아가 68혁명을 주도했던 젊은이들이나, 히피문화를 단순히 키치적으로 소비한 것이 아니라 아나키의 형태로 저항하는 삶의 태도로써 스스로 행동했던 소수의 히피들도 역시 니체적인 이들이다. 이 외에도 짐 모리슨, 로자 룩셈브루크, 비제, Ambient-IDM계열 아티스트 그룹,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니체적인 이들이 있다. 이들이 니체라는 아기의 친구들이다. 즉, 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들이다.
반면 니체주의자들에겐 역설이 발견된다. 단지 니체를 알고자 하는 것은 니체적이지 못하다. 역설적이게도, 니체주의자들은 가장 니체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아폴론적이며, 디오니소스에 이르지 못했다. 니체와 니체주의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이 어쩔 수 없는 카사노바 게임이 고병권씨의 이 책에서도 발견되어진다. 그를 사랑하되, 아직 그에게 사랑받지는 못한다. 저자 고병권씨는 니체를 쓴다. 그의 목소리는 정갈하고 일목요연하다. 의도 역시 명확하다. 서장에서 그는 주사위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주사위를 굴리기도 전에 확률을 계산하는 철학자들이 되지 말고 주사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