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의 의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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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의 의리사상
1. 서론
한말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의 화이적 춘추대의와 존왕양이의 명분론을 사상적 근간으로 하고, 이 항로의 애국우국정신과 기정진의 내수외양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을 한말에 있어서의 배타적·보수적인 사상, 근대화를 저해한 사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말의 위정척사사상은 단순히 배타사상·보수사상으로만 볼 수 없으며 보다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사상이므로 그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면암 최익현의 생애와 사상 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생애
면암 최익현 (勉庵 崔益鉉)은 조선 말기 애국지사로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 승무원부정자로 출사한 후 70년(고종 7)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68년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73년에 대원군이 만동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
(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을 철폐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계유상소(癸酉上疏)’로 대원군 집권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를 비난하는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렸으나 그 내용이 과격방자하다 하여 3년간 제주로 유배되었다. 76년에는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처단을 주장하고, 1906년 윤 4 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여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고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적이 주는 음식물은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하고 굶어 죽었다.
○시대적 상황
1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삼정(三政)의 문란 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
과 이에 따른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심화되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빠른 속도로 그 내부적 질서와 균형을 상실해 가며 약화 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개항직전의 조선조의 정치체제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변질되었고 체제 유지에 기여했던 요소들 사이의 상호 조정관계와 균형관계가 깨어지면서 이것을 구조적 기반으로 했던 체제의 안정을 급속하게 와해되어 갔다.
이와 같이 내부적으로 분해과정을 걷고 있던 조선조 정치체제를 향하여 또 하나의 심각한 도전이 외부로부터 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에 압도적으로 밀어닥친 서양세력과 그 영향을 뜻하며,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한반도는 서양세력의 개방 압력 앞에서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에 더불어 일본과 청국(淸國)도 한반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하여 당시 조선에는 여러 가지 사상들이 제기 되었는데 그것을 대체로 보면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 개화(開化)사상, 동학(東學)사상이 그것이다. 위정척사사상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확립되었고 유교 전통중에 정통(正統)을 이어받는다고 생각하던 유림(儒林)에 의해 지지를 받으며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보존논리로서 역할을 하였다. 개화사상은 서양문화를 수용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개혁하려는 입장에 있던 사조로서 박규수(朴珪壽)를 원류로 하는 젊은 양반엘리트층이 주축이 되어있었고 일부 중인층도 관련되었었다. 이 두 가지 사상적 경향이 주로 전통사회의 상층계급에서 나와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동학사상은 피지배층의 개혁사상이라는 점에서 비교되어진다. 당시의 소외된 엘리트, 즉 몰락 양반의 한 사람이었던 최제우(崔濟愚) 에 의해 창도된 종교인 동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사상은 사회의 저변층에 널리 호소력을 가졌고 1894년의 농민봉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었다. 개화기의 사회는 이상의 세 가지 사상적 입장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유발시키면서 전개되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2 위정척사사상의 발생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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