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민족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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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민족지 논쟁
1. 민족지 논쟁
1) 민족지란 무엇인가?
우선 민족지는 친일지에 반대되는 애국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민족지는 친일 매국행위에 반대되는 애국지를 의미한다. 즉, 민족지라 함은 일제 점령기에 강력한 항일 논조로써 우리 국민의 의식을 대변하고 일제를 비판한 신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민족지라면, 세계사적 보편성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사의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민족의 모순을 극복해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행동으로 구체화 되어야한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널리 알리고 역량을 결집시킴으로써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의 현실은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사적 과제가 당시 시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식민지배와 통치를 거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해방투쟁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민족지가 오랫동안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며, 상황에 따라 민족지와 친일지로 그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민족지 논쟁에 앞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2) 시대적 상황
① 일제의 무단정치와 3.1운동
우리 나라가 일제에 침탈되기 이전부터 민족지는 존재해 왔다. 대표적으로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이 그 신문이다. 황성신문의 남궁억, 유근,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뎨국신문의 이종일, 이승만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한말 언론계를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쓰고 경무청에 체포되는 것과 동시에 황성신문은 정간처분을 받았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는 철저한 헌병경찰 제도로 일체의 언로,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고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언로는 완전히 폐쇄되었다.흔히 무단정치 시대로불리우는 1910년의 한일합방에서부터 1919년의 3.1운동까지의 10년간은 언론의 암흑기였다. 일반 종합 잡지의 발행마저도 어려워 종교 잡지와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단체 또는 학회를 중심으로 발간된 잡지, 그리고 개화 계몽을 위주로 한 잡지들이 언론의명맥을 이어갔다. 이 기간 중 발행된 잡지는 50여 종 가까이 되는데, 이 가운데 종교계통 잡지가 24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그 기간 중엔 일본인 신문들만이 판을 쳤다.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고 한국어 일간지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독무대가 되었다. 매일신보는 일제 기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행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다. 이 신문은 경성일보, 서울프레스‘와 함께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 반민족적 논조로 일본 제국주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방에 민족지인 경남일보만이 외롭게 살아남아 1914년 말까지 발행되었다. 또한 최남선은 무단정치 기간동안 소년을 비롯하여 붉은 저고리, 새벽, 아이들보이, 이상(1913년 창간), 청춘(1914년) 등의 여러 잡지를 발행하여 빈약한 우리나라 민족언론의 명맥을 이어 내려왔다.
② 문화통치로의 전환
1차 대전후 새로운 사조로 등장한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치하에 있던 우리민족에게 큰 호소력을 불러 일으켰고, 총독부 식민통치로 야기된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불안, 가혹한 탄압, 일본 도덕의 강요에 대한 반대 등으로 인해 3. 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무자비한 탄압 정치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의 폐지, 조선인의 관리 임용 및 대우개선, 언론 집회 출판의 고려, 지방자치 시행을 위한 조사 착수,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을 시정 방침으로 밝혔다. 그 이후 나온 사이토의 다음과 같은 발언들은 문화통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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