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 3~5장 - 전후경제복구건설, 사회주의적 개조, 국가사회주의 당의 일원적지도 체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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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 3~5장 - 전후경제복구건설, 사회주의적 개조, 국가사회주의 당의 일원적지도 체제 확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체제 성립사
Ⅰ. 서 론
이 글은 서동만이 저술한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 대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1962년까지 기간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시에 매 단계를 부문별로 나눠 서술하고 있다. 분석부문은 당과 정부의 관계, 당과 군대의 관계, 공업부문의 관리관계, 농업부문의 농업생산체제 및 농촌지역의 통치체제 등의 네 개의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장별 구성으로는 해방과 인민위원회(1945~1946), ‘인민민주주의국가’ 수립과 ‘당=국가’(1946~1950),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개조(1953~1958),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 등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번과제는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전후경제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개조(1953~1958), 국가사회주의와 당의 일원적 지도체제 확립 등 3개의 장을 대상으로 간략히 요약해 보고, 강독의 초점 인 “한국전쟁 후 책임문제와 박헌영 숙청, 초기사회주의 개조과정의 다양성과 역동성, 체제 건설기의 다양한 계파의 존재와 합의”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한다.
Ⅱ. 북조선 사회주의체제성립사 요약
1.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 ~ 1953)
가. 6. 25전쟁과 정치세력관계의 변화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38도선 전 지역에 걸쳐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발발하였다. 그것은 김일성이 38선 이북지역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치영역을 확대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의 완정을 목표로 한 내전이었다. 최고인민위원회는 정령 군사위원회조직을 채택하여 위원장을 김일성, 부상 겸 외무상에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전선 사령관 김책, 민족보위상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국가계획위원장에 정준택 등 6인을 군사위원으로 선출한다. 군사위원회는 공화국 내각의 각 성 및 국을 비롯하여, 그 밖의 국가중앙기관과 각 도·시의 지방군 정부에 배속되었다. 군사위원회는 그 인적 구성에서 볼 때 전시행정과 군사 양면에 걸친 최고의사결정기구였지만,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정치위원회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전쟁 중에도 당의 정비,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으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중요시마다 전쟁 수행상황에 대해 총괄하는 공간으로서 지속 활용되었다. 전쟁의 책임에 있어서는 개전이나 남진자체에 책임을 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6.25전쟁은 미국의 선동에 의한 리승만군의 북침에 대해 인민군이 반격하였다는 개전의 명분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6.25전쟁과 당·군 관계
전쟁발발을 전후하여 상당수의 당 간부가 군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군의 행정직, 특히 많은 사람들이 군의 정치 간부직에 취임하였다. 이것은 전시체제에서 부족한 간부인원을 보충하는 의미도 컸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을 군에 더욱 접근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군의 주요보직을 보면 우선 빨치산 파는 대부분이 초기부터 군 창설에 관여하여 군에 진출해 있었으며, 군 외부에 보직을 갖고 있던 소수의 인물들 중 김일성은 수상으로 최고사령관이 되고, 만주파 군인이지만 정부 내 부수상, 산업상, 당내 정치위원을 겸하고 있던 김책은 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남조선내 당 사업을 담당하여 대중봉기 전술을 취하고 있던 남로계도 이미 1948년 중반 무렵부터 남조선의 상황이 거의 내전상태에 들어감에 따라 유격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무렵 로동당 내 각 정파는 전쟁을 통하여 이상적으로는 연안계의 협력 아래 만주파가 장악하고, 소련계가 실무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정규군형의 군대, 연안계가 지휘하고 있는 인민전쟁형의 군대, 남로계가 목표로 한 유격전형의 병력 및 대중봉기형의 지하조직을 결합하려하였다. 당·군 관계에 있어서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군내 당 조직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16일 인민군후방사령부 문화국장 서휘가 발한「부대 내에서 노동당원의 역할을 높이기 위한 당적사업의 강화에 대하여」라는 지령은 “부대의 골격이고 핵심인 노동당원과의 당적사업을 백방으로 강화함으로써 그들의 자원성, 열성, 모범성을 가일 층 높여 급속한 시일 내에 부대의 전투력과 규율을 강화하기 위하여 ” 당사업과 관련한 구두를 내렸다. 전시 북·중 연합작전 통제에 있어서는 북한과 중국 간에 몇 가지 쟁점이 있었다. 첫째 조중연합사령부 설치를 둘러싼 북한과 중국의 관계였다. 김일성은 중국군이 참전해도 군통수권은 북한 지도부가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중국의 펑떠화는 북한 측에 작전지휘를 맡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선에서 펑떠화는 중국군 사단과 북조선국 사단이 마주치는 경우가 두 차례나 생겨 연합작전 수행을 요청했으나, 김일성은 반대하였다. 중국의 마오쩌뚱은 더 이상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중국군과 북한 최고지휘관이 직접만나 지휘 통수권 문제를 논의 조정할 것을 요구하며, 모스크바의 동의를 얻으려고 시도했다. 스탈린은 전보를 통해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반드시 통일된 지휘체계를 구축해야하며, 중국인민지원군이 전투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중국의 동지가 정(正)이 되고 조선의 동지가 부(副)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 실시된 선거에 대해 파악해 보면 1952년 8~9월 인민군에서 각급 당 조직 지도기관의 총괄 및 선거가 실시되었다. 실제선거가 어는 정도 규정된 절차대로 실시된 것 인지 전혀 불명확하지만 다른 일반 당이나 인민위원회의 선거가 전시라는 상황 때문에 전혀 실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었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군내 당 조직의 인사에 신경이 쓰였는가가 드러났고, 이 무렵 김일성은 군내 당 통제권을 되찾았다.
다. 전쟁의 정치, 군사적 귀결
인민군은 창건 작업을 만주파가 주도하여, 처음부터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도적으로 군을 당의 통제 밖에 둠으로써 가능하였다.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의 전통에 따라서, 김일성의 빨치산 전우들을 골간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조선 인민군의 대전제였다. 인민군이 소련의 정규군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을 스스로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소련의 영향도 컸지만, 인민군은 창건 당초부터 김일성장군의 군대, 빨치산전통의 군대였다.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을 기념, 김일성에게 원수의 칭호가 수여되었고, 차수의 칭호를 받은 최용건은 기념식 보고에서 “조선인민군은 김일성 원수 항일유격투쟁의 빛나는 혁명적 전통과 선진적 소비에트 군대의 제 원칙과 그 풍부한 경험에 따라서 조직되었으며, 김일성 원수는 우리 인민군을 선진적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백전백승의 스탈린식 군사과학과 소비에트군대의 고귀한 전투경험으로 무장된 군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은 남조선 해방이라는 목적에서 보면 전쟁은 참담한 실패였다. 전쟁 기간 중 미군 참전으로 인한 후퇴와 인민군의 괴멸적 붕괴, 소련의 소극적 지원태도, 중국군 참전에 따른 지휘권 이관 등을 통하여 군내에서 김일성의 위치는 일시적으로 동요하였지만, 그는 이러한 변화를 잘 극복해 내고 오히려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50년 말에서 51년 초에 걸친 인민군의 제2차 남진 시기에 유격부대를 정규군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남진에 맞추어 제2전선 역할을 하도록 기존 도당 직속체제로 개편시키는 조치였다. 이러한 군사조직은 후에 박헌영을 권력을 뒷받침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후에 제기되는 정전교섭은 남로당에게 강경자세를 취하는 입장을 만들게 되었다. 이유는 남로당이 유격조직을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전으로 치닫자 남로당의 숙청은 모든 난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었다. 우선 인민군의 명령계통 바깥에 놓여있던 독자의 무장집단이 아무런 저항 없이 제거되었고, 남한의 잔존 유격부대는 정전회담의 의제로도, 포로 송환의 대상으로도 되지 못한 채 괴멸되었다.
라. 전시생산체제와 지방통치제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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